본 연구에서는 정읍 고사부리성의 입지와 형태가 내포하고 있는 성격을 파악하고,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축조기법과 출토 유물을 검토하여 시기별 변천과정과 성격을 살펴보았다. 고사부리성의 입지는 가시권 분석을 통해 보고자 하였다. 고사부리성의 시계는 서쪽으로는 고부천과 평야지대를 조망하고, 동쪽으로는 전북 동부지방에서 서쪽으로 올라오는 교통로를 조망하고 있다. 가시권이 미치지 못하는 북동쪽, 남동쪽은 두승산성과 금사동토성이 보완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사부리성의 형태는 마안봉형 산성의 성격을 가진 테뫼식 산성으로 구분하는게 적절해 보인다. 마안봉형 산성은 내부 평탄지의 확보에 유리하고, 곡부의 수자원을 이용할수 있기 때문에 백제때의 중방성과 조선시대의 읍성의 기능에 부합한다. 고사부리성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이후의 세단계로 구분된다. 삼국시대 산성의 외성벽은 정연하게 다듬은 석재를 이용하여 ‘品’자형으로 성벽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석재간 면을 맞춘 그랭이기법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하단부에서 상단부로 올라갈수록 3~5cm 내외로 들여쌓아 축조하였다. 내성벽은 장방형의 할석으로 축조하였다. 출토 유물은 승문 기와, '上部上巷'명 기와, 단경병, 삼족 기, 호 등이 확인된다. 유물은 대체적으로 7세기 전반의 양상을 나타낸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통일 직후 백제 부흥운동과정에서 산성이 사용되는데, 산성을 점유한 세력이 체성부를 개축하고 수구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수구 설치와 함께 외성벽의 보축시설 설치와 개축의 흔적이 확인된다. 출토 유물인 선문, 격 자문, 무문 기와, '本彼官'명 기와 등은 통일 직후부터 통일신라가 멸망할 때까지의 유물로 확인된다. 고려시대가 되면서 체성부의 상부에서 토성의 흔적이 확인된다. 토성은 박석시설과 함께 확인되지만 조선시대에 읍성으로 개축되면서 외성벽과 상층부가 사라져 자세한 양상은 확인할 수 없다. 이후, 조선시대에 개축되어 읍성으로 이용된다. 문헌기록, 축조기법과 성벽의 높이, 너비 등을 고려하면 1443년 이후 개축되었고, 1451년 이후 다시 한번 퇴축된 것으로 보인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입지와 형식
3. 축조기법과 출토유물 검토
4. 변천과정과 성격
5. 맺음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