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봉덕리고분군(1호분)은 백제의 위세품 사여를 통한 지방간접지배체제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즉, 마한의 분구묘 전통(다장·주구시
설)에 백제 중앙의 석실(주매장시설)을 수용하여 조성하였다.
봉덕리고분군의 주변 유적을 분석한 결과 마한의 재지세력이 백제 근초고왕 24년(369) 단행된 남방 경략 과정에 협조하고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성장-발전하였
다. 특히 인접한 만동유적은 유구와 출토유물을 분석한 결과 이들 세력이 봉덕리고 분군의 기층세력으로 판단된다.
봉덕리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등의 위세품으로 볼 때 봉덕리고분군의 축조세력은 백제 중앙으로부터 일정한 지위를 보장받은 고창지역 일대의 최고 재지수장층으로 추정된다.
6세기 중·후엽 봉덕리고분군에서 더 이상의 매장시설이 축조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백제 성왕의 사비 천도 후 단행된 지방통치체제의 변화(五方制:직접지배)와 성왕의 전사에 따른 신라 정책의 변화로 인해 점차 쇠퇴한 것으로 판단된다.
정리하면 3∼4세기 재지세력인 아산면 일대 분구묘 축조세력은 백제 중앙과의 교류를 시작으로, 성장 발전하여 고창지역의 최고 재지 수장층으로 성장하여 백제 중앙으로부터 일정 기간 그 지위를 인정받으며 존속하였다. 이들 세력에 의해 남겨진 분묘가 봉덕리고분군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6세기 백제 성왕시기의 여러 정책 변화 등으로 인해 봉덕리고분군 축조세력은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파악된다.
목차
1. 머리말
2. 주변유적의 검토
3. 주변유적의 특징과 그 성격
4. 봉덕리고분군과 백제 중앙과의 관계
5. 봉덕리고분군 세력의 쇠퇴
6. 맺음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