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초록
본고는 조선시대 대표적 묘제인 ‘회묘(灰墓)’에 대한 연구가 아직 충분히 축적되지 못한 상황에서, 군산 내흥동유적에서 다량 확인된 회묘를 대상으로 분포·구조·조성방법·조성시기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그 성격과 학술적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본고에서 ‘회묘’는 회(灰)로 곽을 조성한 사례뿐 아니라 천회에만 회를 사용한 경우, 또는 축조 과정에서 소량의 회가 사용된 사례까지 포괄하는 용어로 정의하였다.
내흥동유적에서는 조선시대 분묘 331기(토광묘 272기, 회묘 59기)가 확인되었으며, 회묘는 A·C·D구역에 분포하고 그중 C구역에서 가장 많은 43기가 밀집되어 확인되었다. 회묘는 구릉 사면의 일정 해발에 열상으로 배치되고 상호 중첩이 거의 나타나지 않아, 비교적 짧은 기간에 조성되었거나 집단(또는 집단 간)별로 구획된 묘역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한 입지와 방향 설정은 예서가 제시하는 이상형을 일률적으로 따르기보다, 구릉의 능선과 경사 등 지형 조건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결과로 해석된다.
구조적 형식은 Ⅲ형식 10기, Ⅳ형식 37기, Ⅴ형식 12기로 분류되며, 석회 함량을 낮추거나 부분적으로만 사용하는 간소화된 형식이 주류를 이룬다. 일부 회묘에서는 패각 혼입이 확인되어 해안권이라는 지역 환경이 재료 선택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되며, 지회 사용은 7기(약 12%)로 낮아 전주·완주권과 대비되는 계층적·경제적 기반의 차이를 시사한다. 부장품은 2기에서만 백자단지와 청동숟가락 등이 확인되어 제한적이나마 묘역 내 위상 차를 추정할 수 있으며, 전반적으로 왜란 이후 박장화 경향과도 부합한다.
또한 목관 연륜연대와 방사성탄소연대 분석 결과를 통해 Ⅲ형식은 16세기 후반 이후, Ⅳ·Ⅴ형식은 17세기 중반 이후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된다. 종합하면 내흥동유적 회묘군은 대체로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조선 후기 회묘의 변천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주제어 : 군산 내흥동유적조선시대 분묘회묘사례편람형식분류조선 후기연륜연대
1. 머리말
고고학에서는 오랜 기간 다양한 시기의 분묘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어 왔으나, 500년 이상 지속된 조선시대 분묘 연구는 상대적으로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조선은 통치 수단이자 이념으로 성리학을 채택, 『주자가례(朱子家禮)』를 통해 그 영향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하였으며, 이러한 배경으로 탄생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묘제가 ‘회묘’이다. 회묘는 조선시대 생활상과 장례문화의 규범화 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주자가례』가 표방하는 예(禮)의 실천이 상·장례에서 집약된다는 점에서 회묘 연구는 조선시대 분묘 문화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의의를 갖는다.
그럼에도 그간 조선시대 분묘 연구는 왕릉이나 토광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강했으며, 회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심층적 논의가 축적되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는 사실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라는 시간적 제한이 존재하기에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험에서도 시굴조사나 표본조사 단계에서 회묘가 확인되었음에도 ‘조선시대 유구’라는 이유로 전면 발굴로 전환되지 않는 사례가 있었고, 그 결과 상당수 유구가 충분한 조사 없이 다시 매몰되는 일이 근래까지 반복되었다. 다만 2020년 이후 조선시대 고고학 연구에 대한 인식이 점차 변화하면서 발굴조사 사례가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는 점은 주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중심인 전주를 포함한 전북지역에서도 회묘 연구성과는 여전히 미진한 편이다. 필자는 기존 연구(이종화 2018)를 통해 전북지역 회묘의 분포 현황과 구조·특징을 검토하여 변천 양상을 논한 바 있으며, 그 과정에서 지역별 분포 편차가 뚜렷함을 확인하였다. 즉 대다수 회묘는 조선시대 지방행정을 담당하던 사대부 생활권인 전주·완주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반면, 그 밖의 지역에서는 확인 기수가 현저히 적었다. 또한 전주·완주·김제·익산 등 전북 서부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회묘가 비교적 다수 확인된 데 비해, 군산 지역에서는 회묘 사례가 거의 보고되지 않아 발굴조사 자체가 적은 지역적 편차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군산 내흥동유적에서 조선시대 유구가 400여 기 확인되었고, 이 가운데 회묘가 59기에 이를 만큼 다수 확인되면서 그 의미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내흥동유적 회묘는 전북지역 단일 유적에서 확인된 사례 가운데 가장 많은 수량에 해당하며, 지역 분포 측면에서도 전주·완주권과 비교될 정도의 밀집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본 연구는 군산 내흥동유적에서 확인된 회묘의 분포 양상과 구조·특징, 조성방법 및 조성시기를 비교 사례와 함께 검토하고, 나아가 내흥동유적 회묘의 성격과 그 학술적 의미를 논하고자 한다.
2. 군산 내흥동유적 회묘 분포현황
군산 내흥동유적의 회묘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기에 앞서, 본고에서 사용하는 ‘회묘’는 회(灰)를 사용하여 축조한 분묘를 의미한다. 즉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조선시대 분묘 가운데, 회를 이용해 곽(槨)을 조성한 사례는 물론 천회(天灰)에만 회를 사용한 경우, 또는 분묘 축조 과정에서 소량의 회가 사용된 사례까지도 모두 ‘회묘’로 통일하여 지칭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했듯 회묘는 고려시대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유입되어 조선시대 대표적인 양반층 분묘 형식으로 자리하였고,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예서의 권장 양식으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이해된다(김우림 2007). 회묘의 축조방법은 조선시대 대표 예서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주자가례(朱子家禮)』,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에 정리되어 있다.
조선 건국 이후 『주자가례』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15세기 이후 국가 및 왕실의 예(禮) 체계인 오례(五禮)가 『국조오례의』로 집대성되었다. 『국조오례의』와 『주자가례』에서 제시한 회묘 축조 방식은 대체로 유사하며, 절차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묘광 바닥에 숯을 깔고 나무틀을 설치한 뒤 지회(地灰)를 붓는다. 이어 지회 위에 나무틀(또는 목곽)을 설치하고 삼물(三物)을 둘러 붓는다. 회벽이 굳으면 내부에 목관을 안치하고 횡대를 걸친 다음, 다시 나무틀을 대고 횡대 상부에 천회를 부어 마감한다. 두 예서는 전반적 구성에서 거의 일치하나, 『국조오례의』에서는 나무틀 대신 목곽을 사용한다는 점이 주요한 차이로 지적된다.
한편 『사례편람』에 제시된 축조 방식은 앞선 두 예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소화되어, 나무틀을 설치하고 회를 부어 회곽을 만든 뒤 목관을 안치하고 횡대를 걸친 다음 천회를 부어 완성하는 절차를 소개한다. 『사례편람』은 격변기를 거친 16~17세기에 저술된 여러 사례서(四禮書) 가운데서도 대중적으로 보급된 예서로 알려져 있다. 이에 『주자가례』의 기본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간소화된 형태로 확산되었는데, 이러한 간소화의 배경으로는 회묘의 대중화 과정에서 석회 함량을 줄이고, 임진왜란 이후 물자 부족에 대응하려는 현실적 필요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이종화 2018). 또한 18세기 실학의 발달 이후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복잡한 가례를 현실에 적용하기 쉽게 정리한 실천 중심 예서의 편찬이 활발해졌다는 점 역시, 회묘 구조가 간소화되는 한 요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김시덕 2012).
각각의 대표 예서에서 기술하는 회묘의 조성방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도면 1〉 문헌별 회묘 축조방법 모식도(이종화 2018, P11 재인용)
군산 내흥동유적에서는 조선시대 분묘가 총 331기 확인되었으며, 6개 구역(A, B-1, B-2, C, D, E) 중 B-1구역을 제외한 5개 구역에서 분포가 확인되었다. 분묘 유형별로는 토광묘가 272기로, 회묘 59기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량을 차지한다. 또한 각 구역에서 토광묘와 회묘는 모두 일정 범위에 밀집하는 군집 양상을 보인다.
회묘는 6개 구역 가운데 A·C·D 구역에서만 확인되었으며, 이 중 C구역에서 43기가 확인되어 가장 높은 밀도를 보인다. 군산 내흥동유적의 분묘 현황은 <표 1>과 같고, 회묘의 분포 양상은 <도면 2·3·4>에 제시하였다.
〈표 1〉 군산 내흥동유적 조선시대 분묘 현황표
| 구분 | A구역 | B-2구역 | C구역 | D구역 | E구역 | 합계 |
|---|---|---|---|---|---|---|
| 토광묘 | 7 | 43 | 158 | 53 | 11 | 272 |
| 회묘 | 4 | - | 43 | 12 | - | 59 |
내흥동유적에서 확인된 회묘는 총 59기로, A구역 4기·C구역 43기·D구역 12기가 확인되었다. A·C·D구역은 모두 해발고도 30m 내외의 비교적 낮은 구릉에 입지하며, 회묘는 경사면을 따라 해발 12~15m 구간에 밀집 분포하는 양상을 보인다. 회묘들은 전반적으로 열상배치를 이루는데, 이들 회묘의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대체로 직교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장축방향이 남동–북서 또는 남서–북동 등으로 다소 상이하게 나타나는 것은 구릉의 미세한 지형 조건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되며, 두향은 공통적으로 구릉 상부를 향하도록 설정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양상은 초기철기시대 이후 분묘유구가 지형상 경사도가 높은 방향에 두향을 두는 경향이 있다는 점과도 부합한다(조진선 2003). 또한 『주자가례』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시신의 두향을 북쪽으로 두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이후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구릉 경사면 상부 쪽으로 머리를 두는 방식이 확산되었다는 견해도 제시된 바 있다(정종수 1994).
이처럼 동일 구릉의 정상부와 사면부 일원에 밀집 조성된 회묘가 상호 중첩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확인된 점은, 회묘의 조성 기간이 비교적 길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회묘 조성 집단이 단일 집단이었거나, 혹은 복수 집단이 묘역을 구획하여 조성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즉 회묘 조성 과정에서 기존 묘역의 존재를 상호 인지하고 이를 회피하며 축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주변에서 함께 확인되는 다수의 토광묘 역시 상호 중복 양상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분묘 유형과 조성 방식은 달랐더라도 묘역을 조성한 집단 간에 일정한 공유 인식(경계·구획에 대한 합의)이 존재했음을 뒷받침한다.
〈도면 2〉 내흥동유적 A구역 회묘 분포도
〈도면 3〉 내흥동유적 C구역 회묘 분포도
〈도면 4〉 내흥동유적 D구역 회묘 분포도
또한 일반적으로 분묘는 일조가 양호한 입지를 선호하며,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구릉의 남사면이나 조망이 유리한 곳에 조성되는 경향이 그간 조사된 조선시대 분묘 자료를 통해 확인되어 왔다. 내흥동유적의 분묘 역시 구릉 남사면에 위치하기는 하나, 그 방향성은 기존에 알려진 조선시대 분묘와 달리 구릉의 능선과 지형적 조건에 맞추어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분묘 조성 과정에서 예서를 반드시 준수하기보다, 입지의 현실적 여건을 우선하여 조성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양상은 최근 조사된 익산 마동유적, 익산 용순리 노상유적, 임실 금암리유적에서도 확인되는데, 해당 유적의 조선시대 분묘(토광묘·회묘)는 남사면이나 조망이 유리한 지점이 아니라 지형 여건에 따라 묘역이 조성된 사례가 확인된다. 따라서 조선시대 분묘는 예서를 온전히 따르기보다, 지형 조건에 맞춰 탄력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군산 내흥동유적에서 확인된 회묘 59기에 대한 현황을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표 2〉 군산 내흥동유적 회묘 제원표
| 구역 | 번호 | 장축방향 | 묘광규모(㎝) | 회곽규모(㎝) | 유물 및 내부시설 | 형식 | |||||
|---|---|---|---|---|---|---|---|---|---|---|---|
| 길이 | 너비 | 깊이 | 장단비 | 길이 | 너비 | 깊이 | |||||
| A | 1 | 남-북 | 212 | 74 | 69~123 | 1:2.86 | 192 | 80 | 41 | - | Ⅳ |
| 2 | 남-북 | 211 | 68 | 58~88 | 1:3.10 | 187 | 40 | 35 | - | Ⅳ | |
| 3 | 남-북 | 211 | 72 | 34~64 | 1:2.93 | 200 | 56 | 50 | - | Ⅴ | |
| 4 | 남-북 | 211 | 72 | 34~64 | 1:2.93 | 200 | 64 | 56 | - | Ⅳ | |
| C | 1 | 남서-북동 | 225 | 87 | 54 | 1:2.58 | 192 | 45 | 55 | - | Ⅳ |
| 2 | 남서-북동 | (215) | 77 | (63) | 1:2.79 | (182) | 43 | 40 | - | Ⅳ | |
| 3 | 남서-북동 | 215 | 85 | 50~82 | 1:2.52 | 190 | 63 | 45 | - | Ⅴ | |
| 4 | 남동-북서 | (193) | 84 | 123 | 1:2.29 | (166) | 57 | 48 | - | Ⅴ | |
| 5 | 남동-북서 | 248 | 75 | 77~124 | 1:3.30 | 192 | 53 | 54 | - | Ⅳ | |
| 6 | 남동-북서 | 192 | 65 | 25~70 | 1:2.95 | 200 | 64 | 55 | - | Ⅳ | |
| 7 | 남-북 | (230) | 83 | 140 | 1:2.77 | 202 | 57 | 56 | - | Ⅳ | |
| 8 | 남동-북서 | 205 | 71 | 74~108 | 1:2.88 | 177 | 55 | 43 | - | Ⅴ | |
| 9 | 남동-북서 | 207 | 81 | 80~100 | 1:2.55 | 169 | 41 | 28 | - | Ⅴ | |
| 10 | 남동-북서 | 205 | 76 | 37~64 | 1:2.69 | 190 | 53 | 46 | - | Ⅴ | |
| 11 | 남동-북서 | 223 | 80 | 55~102 | 1:2.78 | 205 | 57 | 52 | - | Ⅳ | |
| 12 | 남동-북서 | 224 | 95 | 134 | 1:2.35 | 204 | 64 | 55 | - | Ⅳ | |
| 13 | 남동-북서 | 210 | 80 | 85~105 | 1:2.62 | 187 | 74 | 45 | - | Ⅴ | |
| 14 | 남동-북서 | 232 | 70 | 70~110 | 1:3.31 | 167 | 40 | 40 | - | Ⅳ | |
| 15 | 남동-북서 | 204 | 75 | 53~93 | 1:2.72 | 170 | 46 | 40 | - | Ⅴ | |
| 16 | 남동-북서 | 226 | 80 | 90~128 | 1:2.82 | 205 | 57 | 66 | - | Ⅳ | |
| 17 | 남동-북서 | 212 | 72 | 37~62 | 1:2.94 | 178 | 34 | 35 | - | Ⅳ | |
| 18 | 남동-북서 | 209 | 80 | 60~90 | 1:2.61 | 172 | 40 | 55 | - | Ⅳ | |
| 19 | 남-북 | 212 | 74 | 67~92 | 1:2.86 | 192 | 52 | 52 | - | Ⅲ | |
| 20 | 남동-북서 | 202 | 79 | 40~63 | 1:2.55 | 177 | 52 | 50 | 지회 | Ⅳ | |
| 21 | 남동-북서 | 205 | 78 | 52~80 | 1:2.62 | 183 | 50 | 62 | - | Ⅳ | |
| 22 | 남동-북서 | 220 | 70 | 52~89 | 1:3.14 | 195 | 44 | 55 | - | Ⅳ | |
| 23 | 남동-북서 | 228 | 85 | 103~145 | 1:2.68 | 180 | 44 | 50 | - | Ⅳ | |
| 24 | 남동-북서 | 216 | 72 | 5~91 | 1:3.0 | 183 | 33 | 25 | - | Ⅴ | |
| 25 | 남동-북서 | 220 | 73 | 75~108 | 1:3.0 | 200 | 50 | 50 | - | Ⅳ | |
| 26 | 남동-북서 | 210 | 74 | 50~94 | 1:2.83 | 170 | 45 | 60 | - | Ⅲ | |
| 27 | 남동-북서 | 197 | 78 | 15~68 | 1:2.52 | 177 | 47 | 43 | - | Ⅳ | |
| 28 | 남동-북서 | 220 | 72 | 84~120 | 1:3.05 | 181 | 24 | 44 | - | Ⅳ | |
| 29 | 남동-북서 | 215 | 73 | 82~128 | 1:2.94 | 175 | 55 | 57 | - | Ⅳ | |
| 30 | 남동-북서 | 235 | 78 | 75~128 | 1:3.01 | 197 | 50 | 60 | - | Ⅳ | |
| 31 | 남동-북서 | 210 | 77 | 115~144 | 1:2.72 | 180 | 40 | 40 | - | Ⅳ | |
| 32 | 남동-북서 | 227 | 77 | 48~83 | 1:2.94 | 184 | 47 | 50 | - | Ⅴ | |
| 33 | 남동-북서 | 226 | 76 | 37∼52 | 1:2.97 | 210 | 52 | 54 | - | Ⅳ | |
| 34 | 남동-북서 | 230 | 89 | 80~120 | 1:2.58 | 198 | 60 | 70 | 백자단지, 청동 숟가락, 지회 |
Ⅲ | |
| 35 | 남동-북서 | 225 | 87 | 50~97 | 1:2.59 | 192 | 60 | 58 | 지회 | Ⅲ | |
| 36 | 남동-북서 | 232 | 80 | 60~87 | 1:2.90 | 210 | 58 | 52 | - | Ⅲ | |
| 37 | 남동-북서 | 235 | 80 | 15~97 | 1:2.94 | 198 | 35 | 55 | 지회 | Ⅳ | |
| 38 | 남동-북서 | 227 | 80 | 109~168 | 1:2.84 | 204 | 60 | 40 | - | Ⅲ | |
| 39 | 남동-북서 | 227 | 86 | 57~100 | 1:2.64 | 226 | 57 | 54 | - | Ⅴ | |
| 40 | 남동-북서 | 219 | 70 | 50~86 | 1:3.13 | 193 | 50 | 40 | - | Ⅲ | |
| 41 | 동-서 | 214 | 86 | 60~108 | 1:2.49 | 190 | 60 | 60 | - | Ⅴ | |
| 42 | 남동-북서 | 234 | 82 | 70~92 | 1:2.85 | 202 | 57 | 50 | - | Ⅳ | |
| 43 | 동-서 | 225 | 77 | 95~130 | 1:2.92 | 196 | 58 | 60 | 지회 | Ⅳ | |
| D | 1 | 남서-북동 | 220 | 82 | 96 | 1:2.68 | 185 | 53 | 54 | - | Ⅳ |
| 2 | 남서-북동 | 219 | 83 | 109 | 1:2.64 | 81 | 42 | 62 | - | Ⅲ | |
| 3 | 남서-북동 | 219 | 84 | 96 | 1:2.61 | 195 | 55 | 54 | 지회 | Ⅳ | |
| 4 | 남서-북동 | 228 | 76 | 120 | 1:3.0 | 202 | 53 | 60 | - | Ⅳ | |
| 5 | 남서-북동 | 218 | 76 | 84 | 1:2.87 | 176 | 42 | 42 | - | Ⅳ | |
| 6 | 남서-북동 | 234 | 82 | 104 | 1:2.85 | 186 | 43 | 45 | - | Ⅳ | |
| 7 | 남서-북동 | 224 | 78 | 60~104 | 1:2.87 | 197 | 55 | 49 | - | Ⅳ | |
| 8 | 남서-북동 | 246 | 85 | 104 | 1:2.89 | 219 | 56 | 62 | - | Ⅳ | |
| 9 | 남서-북동 | 232 | 81 | 106~134 | 1:2.86 | 200 | 56 | 60 | 청동숟가락1, 벽감, 지회 | Ⅲ | |
| 10 | 남-북 | 220 | 82 | 120~136 | 1:2.68 | 180 | 53 | 64 | - | Ⅲ | |
| 11 | 남-북 | 230 | 85 | 112~142 | 1:2.71 | 193 | 62 | 66 | - | Ⅳ | |
| 12 | 남-북 | 194 | 78 | 120 | 1:2.49 | 167 | 56 | 69 | - | Ⅳ | |
3. 군산 내흥동유적 회묘의 특징
1) 형식설정 및 분류
내흥동유적에서 확인되는 회묘는 기존 연구(이종화 2018)에 따른 형식분류상2 Ⅲ형식(회묘에 목곽이 없으며, 바닥에 지회 사용여부에 따라 1, 2형식으로 분류), Ⅳ형식(마사토와 석회 일부를 섞어 사용한 형식), Ⅴ형식(이단굴광 상부와 천회만 회를 사용한 형식)으로 분류되며 <표 3>과 같다.
〈표 3〉 내흥동유적 구역별 회묘 형식분류표
| 구역 | 형식 | 합계 | ||
|---|---|---|---|---|
| Ⅲ | Ⅳ | Ⅴ | ||
| A | 3 | 1 | 4 | |
| C | 7 | 25 | 11 | 43 |
| D | 3 | 9 | - | 12 |
| 합계 | 10 | 37 | 12 | 59 |
내흥동유적의 회묘는 예서 중에서도 『사례편람』에 제시된 축조방법을 모방·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례편람』식 회묘 조성 방식은 전북지역 회묘에서 가장 빈번하게 확인되는 축조법으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의 보편적 구조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양상은 전란 이후 물자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사회적 조건 속에서, 당시 현실에 맞춘 축조방법의 간소화가 진행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내흥동유적 회묘의 형식을 살펴보면 Ⅲ형식이 10기, Ⅳ형식이 37기, Ⅴ형식은 12기가 확인되었다. 이 중 석회의 비율을 낮춰 충전토와 같은 형태로 조성한 회묘 방식 및 마사토와 석회 일부를 혼합하여 사용한 Ⅳ형식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였다. 구역별로 살펴보면 A구역은 Ⅳ·Ⅴ형식만 확인되며, C구역은 Ⅲ~Ⅴ형식 모두 확인된다. D구역에서는 Ⅲ형식과 Ⅳ형식만 확인되었다.
〈도면 5〉 내흥동유적 회묘 형식별 현황도 및 분포 빈도
〈도면 5〉를 통해 형식별 분포 빈도를 검토하면, 전체 59기 가운데 석회 함량이 상대적으로 높은 Ⅲ형식은 17%로 가장 낮은 비율을 보인다. 반면 석회보다 마사토·점토 비중이 높아 재질이 비교적 쉽게 붕괴되는 Ⅳ형식은 63%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며, 천회에만 석회를 사용한 Ⅴ형식은 20%로 두 번째로 높은 비율을 보인다. 즉 내흥동유적 회묘는 석회 함량을 낮추거나 부분적으로만 사용하는 ‘간소화된’ 형식이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정리된다. 이러한 경향은 17세기 이후 회묘가 기존의 사대부 중심에서 벗어나 예서 보급과 함께 일반 서민까지 확산·정착되며 성행한 흐름과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C구역에서 확인된 21호(Ⅲ형식)·22호(Ⅳ형식) 회묘는 패각을 혼입하여 회묘를 조성한 특징을 보인다. 이는 군산이 해안권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지역적 환경이 반영된 결과로 이해된다. 관련 사료로, 명대 송응성(宋應星)의 『천공개물(天工開物)』에는 석회 제작 시 석회석 또는 굴껍질을 소성하여 자연적으로 분말화한 뒤 사용한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때 석회석을 소성한 것은 석회(石灰), 굴껍질을 소성한 것은 여회(蠣灰)로 구분하며, 석회석 확보가 어려운 지역에서는 여회를 대용하였다고 한다3. 이와 같은 기록을 고려하면, 내흥동 일원에서도 확보가 용이한 재료로서 패각을 활용하여 회묘를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주변에서 내흥동 패총과 선유도 패총 등이 확인되는 점은, 이 일대에서 패각이 오래전부터 중요한 자원으로 활용되었음을 뒷받침한다.
〈표 4〉 군산 내흥동유적 형식별 회묘 모식도 및 현황표
| Ⅲ형식 | - C구역 : 19, 26, 34, 35, 36, 38, 40호 - D구역 : 2, 9, 10호 |
|
|---|---|---|
| Ⅳ형식 | - A구역 : 1, 2, 4호 - C구역 : 1, 2, 5, 6, 7, 11, 12, 14, 16, 17, 18, 20, 21, 22, 23, 25, 27, 28, 29, 30, 31, 33, 37, 42, 43호 - D구역 : 1, 3, 4, 5, 6, 7, 8, 11, 12호 |
|
| Ⅴ형식 | - A구역 : 3호 - C구역 : 3, 4, 8, 9, 10, 13, 15, 24, 32, 39, 41호 |
〈표 4〉를 통해 내흥동유적 회묘의 형식 분포를 종합하면, Ⅰ·Ⅱ형식은 확인되지 않고 Ⅲ형식 이후의 형식만 확인된다. Ⅰ·Ⅱ형식은 목곽의 유무가 핵심 분류 기준이며, 『주자가례』·『국조오례의』 등 조선 전기의 예서에서도 목곽 사용 여부에 따라 회묘 축조법이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목곽의 유무는 시간성을 반영하는 지표로서, 내흥동유적을 포함한 전북지역 회묘의 구조와 특징, 나아가 변천 양상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와 같이 내흥동유적 회묘에서는 조선 전기에 특징적으로 확인되는 목곽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내흥동유적 회묘의 조성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핵심 단서로서, 적어도 15세기 이전에 회묘가 조성되었을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판단된다. 내흥동유적에서 확인된 회묘의 구조별 형식 분류를 대표하는 사례는 아래 <도면 6>과 같다.
〈도면 6〉 내흥동유적 회묘 구조별 형식분류
2) 규모와 구조 특징
(1) 규모
내흥동유적에서 확인된 회묘 59기는 대체로 말각장방형 평면을 띠며, 장·단축 길이 또한 큰 편차 없이 유사한 규모를 보인다. 장축과 단축 길이(장단비)에 따른 변화상을 기존 연구성과와 비교하면, 내흥동유적은 전북지역 회묘에서 제시된 형식별 변화와는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
〈표 5〉의 형식별 장단비를 검토한 결과, 전북지역 회묘에서 뚜렷하게 확인되었던 형식별 규모 변화가 내흥동유적에서는 뚜렷하지 않다. 내흥동유적 회묘의 장단비 평균은 약 1:2.8이며, 최솟값은 C구역 4호(1:2.29), 최댓값은 C구역 14호(1:3.31)로 확인되어, 전체적으로 큰 폭의 차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표 5〉 내흥동유적 회묘 형식별 장단비 현황표
| 형식 장단비 | Ⅲ | Ⅳ | Ⅴ |
|---|---|---|---|
| 2.0~2.5 | 2 | 2 | |
| 2.5~3.0 | 9 | 27 | 9 |
| 3.0~3.5 | 1 | 8 | 1 |
기존 연구에 따르면 전북지역 회묘(표본수 131)는 Ⅲ형식에서 Ⅳ형식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장단비가 비교적 크게 증가하고, Ⅱ·Ⅲ형식에 비해 Ⅳ·Ⅴ형식에서 장단비가 높아지는 경향이 확인된다(도면 7). 이는 후대로 갈수록 회묘가 간소화·세장화되는 현상으로 해석된 바 있다. 그러나 내흥동유적(표본수 59)에서는 Ⅲ·Ⅳ·Ⅴ형식이 구분되어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형식 변화에 비해 장단비(규모)의 변동 폭이 크지 않다.
〈도면 8〉의 장단비 히스토그램을 보면, 내흥동유적 회묘의 장단비는 1:2.48~ 3.05 구간에 밀집한다. 특히 Ⅳ형식이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며, Ⅲ형식과 Ⅴ형식 또한 서로 대동소이한 분포를 나타낸다. 이는 내흥동유적의 회묘 조성 집단이 조성방법이나 시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규모 범위를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묘역을 조성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왜란 이후 규범에 따른 간소화·세장화의 영향보다, 내흥동유적의 지역적 특성 또는 조성 집단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더 강하게 반영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회묘의 입지에 따른 규모 차이도 뚜렷하지 않다. 구릉 상부에 위치한 회묘와 하단부에 위치한 회묘 사이에서 규모의 유의미한 차이가 확인되지 않아, 회묘의 규모와 배치에 신분이나 경제력이 직접 반영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형식 변화가 확인되는 만큼, 시대 흐름에 맞춘 구조적 변화는 일정 부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도면 7〉 전북지역 회묘 각 형식별 장단비 상자도표
(n=131, Ⅱ형식=12, Ⅲ형식=83, Ⅳ형식=29, Ⅴ형식=7)(이종화 2018)
〈도면 8〉 군산 내흥동유적 회묘 장단비 히스토그램
형식별 분포를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각 형식이 산발적으로 분포한다. 다만 회묘 수가 가장 많은 C구역에서는 서쪽 회묘들에서 비교적 이른 형식인 Ⅲ형식이 많고, 동쪽으로 갈수록 Ⅳ·Ⅴ형식이 증가하는 경향이 확인된다. 이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분묘군이 점진적으로 확대되며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A구역에서는 해발 약 14m의 구릉 상단부에 2~4호 회묘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1호 회묘는 해발 11m 내외의 하단부에 단독으로 위치한다. 2~4호 회묘의 장단비는 1:3.0 내외로 유사한 반면, 1호 회묘는 1:2.68로 상대적으로 이질적이다. 따라서 A구역 1호 회묘의 피장자 집단과 2~4호 회묘의 피장자 집단은 서로 다른 집단일 가능성이 있다.
D구역은 해발 약 17m 내외의 구릉 상단부에서 해발 12m 내외의 하단부까지 경사면을 따라 회묘가 조성된 형태이며, 능선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장축방향을 달리하며 군집이 나뉜다. 동쪽에는 3~6호 회묘가 열을 이루며 비교적 단독 분포하고, 서쪽에는 1·2호와 7~12호 회묘가 열상 배치된다. 규모는 동쪽 회묘가 장단비 1:2.5~2.7 내외, 서쪽 회묘가 1:2.8~3.0 내외로 서쪽이 다소 크게 확인된다. 다만 형식 분포를 보면 Ⅲ형식은 동쪽에, Ⅳ형식은 서쪽에 상대적으로 집중되는 양상이 확인되어, 규모 차이를 단순히 신분·경제력의 반영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에 D구역 역시 A구역과 유사하게, 동쪽 피장자 집단이 먼저 회묘를 조성한 뒤, 이후 다른 집단이 서쪽에 분묘를 확장하며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2) 구조
앞서 내흥동유적에서 확인된 회묘 59기에 대하여 축조방법과 구조를 기준으로 형식 분류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 Ⅲ형식 10기, Ⅳ형식 37기, Ⅴ형식 12기로 구분되었으며, 대다수는 예서 『사례편람』의 회묘 축조방법을 모방·수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Ⅲ형식은 『사례편람』의 회묘 축조법과 가장 유사한데, 장·단벽에 회를 사용해 곽을 조성하고 종대 또는 횡대를 올린 뒤 천회를 덮는 구조를 갖는다. 아울러 바닥에 지회(地灰) 사용 여부에 따라 세부 분류도 가능하다.
내흥동유적에서는 회묘 바닥에 지회를 사용한 사례가 총 7기 확인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지회 사용의 유·무가 형식분류와 단순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회묘에 사용되는 회의 비중은 시기 변화에 따라 점차 감소하며, 후대로 갈수록 바닥을 지회로 처리하지 않고 생토면을 그대로 사용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경향이 확인된다(이종화, 2018). 또한 기존 전북지역 연구에서도 Ⅳ형식을 포함한 이후 형식에서 지회가 확인된 사례는 1회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그러나 내흥동유적에서는 이를 상회하는 지회 사용 사례가 확인되어, 형식 변화(간소화)만으로 지회 사용 양상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표 6>은 내흥동유적에서 지회가 확인된 회묘의 분류표이다.
〈표 6〉 지회 사용 회묘 분류표
| 구분 | 번호 | 형식 |
|---|---|---|
| C구역 | 20 | Ⅳ |
| 34 | Ⅲ | |
| 35 | Ⅲ | |
| 37 | Ⅳ | |
| 43 | Ⅳ | |
| D구역 | 3 | Ⅳ |
| 9 | Ⅲ |
지회 사용 회묘는 총 7기로, C구역 5기, D구역 2기가 확인된다. 형식별로는 Ⅲ형식 3기, Ⅳ형식 4기이며, Ⅳ형식이 더 많은 개체수를 보인다. 회의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회와 마사토를 혼합하여 회벽을 조성한 Ⅳ형식에서 지회가 확인된다는 점은, 단순히 “회 사용량 절감→축조 간소화”라는 도식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또한 <도면 9>·<도면 10>은 전주·완주 이외 지역에서 확인된 지회 사용 회묘 사례를 내흥동유적과 비교한 것으로, Ⅲ형식과 Ⅳ형식에서 지회 확인 사례가 증가한다는 점은 중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다만 빈도 측면에서 보면 내흥동유적은 기존 전북지역 회묘와 유사한 양상도 확인된다. 즉 내흥동유적 회묘 59기 중 지회 사용 사례는 7기(약 12%)에 불과하다. 기존 연구에서는 전북지역 회묘 150기 가운데 50기에서 지회가 확인되어 33%를 상회하며, 특히 지방행정 중심지였던 전주·완주 지역에서는 89기 중 45기에서 지회가 확인되어 50%를 넘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반면 전주·완주 이외 지역에서는 61기 중 5기(약 8%)만 지회가 확인되어, 내흥동유적과 유사한 수준을 보인다. 이는 회묘가 사대부층을 중심으로 조성되었고, 그와 연동하여 지회 사용 역시 계층적·경제적 기반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결과적으로 전주·완주권을 벗어난 지역에서는 내흥동유적처럼 지회 사용이 현저히 낮고, 생토면을 회묘 바닥으로 처리한 사례가 상대적으로 많이 확인된다.
| 군산 내흥동유적 D구역 9호 회묘 | 남원 사석리 사촌유적 4호 회묘 |
〈도면 9〉 Ⅲ형식의 지회 출토사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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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 내흥동유적 C구역 43호 회묘 | 임실 갈마리 해평유적 2호 회묘 |
〈도면 10〉 Ⅳ형식의 지회 출토사례 비교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풍수설의 영향이다. 회묘가 『주자가례』 등 예서의 보급과 함께 분묘 조성 방식의 한 축을 형성했음에도, “땅의 기운이 통해 관이 오래 썩지 않는다”는 풍수적 인식이 바닥 처리 방식에 강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4. 둘째, 지역적 특성 또는 조성 집단의 선택(성향)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다. 예컨대 김제 월성동유적에서 확인된 회묘 27기 모두 마사토+회를 조합한 Ⅳ형식이며, 바닥은 생토면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한편 임실 해평유적 2호 회묘(Ⅳ형식)에서는 지회 사용이 확인되는 반면, 같은 임실권의 금암리유적 Ⅳ형식 회묘 2기는 생토면을 사용한다. 이처럼 지회 사용이 유적·지역에 따라 혼재하는 양상을 고려하면, 지회 사용 여부는 일정 부분 조성 집단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전주·완주권을 벗어난 지역에서 전반적으로 지회 사용 빈도가 낮은 점을 감안하면, 신분과 경제력 역시 분묘 조성 방식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이해된다.
(3) 유물
분묘에 부장품을 매납하는 행위는 선사시대부터 지속되어 왔으며, 매납된 부장품은 피장자의 신분과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 이해되어 왔다. 성리학 도입 이후 『주자가례』와 이를 토대로 편찬된 『국조오례의』 등 예서에서는 상장례 전반의 규범을 정립하여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고, 특히 유교적 질서 유지를 위해 분묘 부장품의 사용 또한 제도적으로 규율하였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전북지역 회묘 150기 가운데 27기에서 부장품이 확인되었으나, 이는 주로 이른 시기에 조성된 회묘에 한정되며, 왜란 이후 조성된 회묘에서는 부장품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부장품의 박장화(薄葬化) 현상은 회묘뿐 아니라 토광묘에서도 공통적으로 확인되어, 왜란 이후 혼란과 궁핍이 심화된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내흥동유적 회묘에서도 전주·완주 이외 지역에서는 비교적 드물게 확인되는 부장품 매납 사례가 확인되어, 회묘 군집 내 일부 유구의 신분적·위상적 성격을 제한적으로나마 추정할 수 있었다. 부장품은 C구역 34호 회묘와 D구역 9호 회묘에서 확인되었는데, C구역 34호에서는 백자단지 1점과 청동숟가락 1점이, D구역 9호에서는 청동숟가락 1점이 출토되었다. 두 회묘 모두 Ⅲ형식에 해당하며, 각 구역에서 회묘가 조성된 중심부에 위치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또한 백자와 청동숟가락은 전북지역 회묘에서 상대적으로 빈번하게 확인되는 대표적 부장품에 해당한다.
부장품이 확인된 회묘의 표본 수가 적어 정밀한 비교에는 한계가 있으나, 적어도 내흥동유적 회묘 군집 내에서 이들 회묘가 다른 57기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위상을 가졌을 가능성은 제기할 수 있다. <도면 11>은 내흥동유적 출토 청동숟가락과 김제 월성동유적 출토 청동숟가락을 비교한 것으로, 회묘의 구조적 형식 변화가 진행되더라도 부장품인 청동숟가락의 형태적 변화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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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구역 34호 회묘(Ⅲ형식) 출토 D구역 9호 회묘(Ⅲ형식) 출토 |
13호 회묘(Ⅲ형식) 출토 20호 회묘(Ⅳ형식) 출토 |
| 군산 내흥동유적 회묘 출토 청동숟가락 | 김제 월성동유적 회묘 출토 청동숟가락 |
〈도면 11〉 회묘 내 청동숟가락 출토사례 비교
이와 같이 내흥동유적 회묘에서도 전북지역 회묘 전반의 경향과 유사하게 출토 유물의 수가 많지 않고, 유물의 기형·형태에서도 큰 차이가 확인되지 않아 유물만으로 시기 설정을 논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른다. 그럼에도 출토 유물을 통해 회묘 간의 서열(위상)을 일정 부분 가늠할 수 있다는 점, 청동숟가락·백자 등 표시적(상징적) 성격의 유물이 중심을 이룬다는 점, 그리고 왜란 이후 회묘의 형식 변화와 부장품의 박장화가 일정하게 연동된다는 점에서, 내흥동유적에서 부장품이 매납된 회묘가 확인된 사실은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된다.
4. 군산 내흥동유적 회묘의 변천양상
앞서 군산 내흥동유적에서 확인된 회묘에 대하여 형식 설정과 분류를 시도하고, 분포 현황과 규모·구조적 특징, 제한적이나마 출토유물 등을 검토하였다. 내흥동유적에서 확인된 회묘 59기는 전북지역 단일 유적에서 확인된 사례 가운데 가장 많은 수량에 해당하며, 기존에 알려진 전북지역 회묘와 유사한 점과 함께 상이한 양상도 동시에 확인된다.
기존 연구에서 형식 변화는 대체로 규모 변화와 연동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내흥동유적 회묘는 Ⅲ형식에서 Ⅴ형식에 이르기까지 장단비(규모)가 큰 차이 없이 비교적 일정하게 조성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내흥동유적 회묘는 정형화된 변화 양상에서 다소 벗어나지만, 다량의 표본 확보와 분포·구조(축조방법)에 근거한 형식 분류를 통해 대략적인 조성 시기를 추정·제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 토광묘는 시간 경과에 따라 너비 변화 없이 길이가 길어지고 굴광이 깊어지며, 회곽묘의 영향으로 이단굴광 형태가 증가하는 경향이 보고된 바 있다(김경선 2009). 또한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17세기부터는 경제적 피폐화의 영향으로 부장품이 간소화되고 박장(薄葬)이 일반화되며, 이에 따라 벽감 등 내부시설도 점차 소멸하는 양상이 제시되었다(박춘규 2018). 내흥동유적 회묘에서도 규모 변화는 크지 않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른 구조적 변화는 분명히 확인된다. 즉 회로 곽을 조성하는 Ⅲ형식에서, 회와 마사토를 혼합하여 곽을 조성하는 Ⅳ형식으로, 더 나아가 곽을 별도로 조성하지 않고 천회로 마감하는 Ⅴ형식으로의 변화가 확인된다. 다시 말해, 정형적인 회곽을 갖춘 회묘가 이단굴광으로 전환되는 과정, 그리고 상부에만 천회를 사용하는 간소화된 사례가 적지 않게 확인된 것이다.
이러한 형식 변화는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 나타나는 회묘 조성 방식에서 19세기 조선 후기 회묘까지의 변화 흐름을 반영하는 것으로, 내흥동유적 회묘군은 조선 후기 회묘의 변천 양상을 비교적 잘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전북 일부 지역에서만 확인되었던 Ⅳ형식 회묘의 다수 확인은 Ⅲ형식에서 Ⅴ형식으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기존 전북지역 연구에서는 Ⅲ형식에서 Ⅳ형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장·단축 길이의 변동 폭이 커지고 세장화가 진행되는 현상을, 단순한 ‘회 사용량 감소’나 ‘시기 차이’만이 아니라 회묘 조성 집단 또는 지역적 성격(특징)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한 바 있다(이종화 2018). 아울러 왜란 이후 물자 공급의 어려움으로 석회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고려하면, 회곽 조성 시 마사토를 혼합하여 대체(Ⅳ형식)하고, 이후 더욱 간소화된 Ⅴ형식으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또한 전북지역에서 상대적으로 확인이 드물던 Ⅴ형식 회묘가 다수 확인된 점은 Ⅳ형식과 함께 조선 후기 회묘의 변화상을 더욱 세밀하게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기존 연구에서는 Ⅴ형식의 존속 시기가 19세기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며, 서울·경기지역 남양주 별내지구에서 확인된 회묘 206기 중 24기가 본고의 Ⅳ·Ⅴ형식과 유사하다는 점, 그리고 출토 명기 및 주변 유적과의 비교를 통해 해당 형식의 존속 시기를 16세기 후반~19세기로 판단한 사례도 보고된 바 있다(조영선 2011). 이러한 늦은 형식의 회묘 확인은, 16세기 이전 회묘가 왕실·사대부를 중심으로 예서를 비교적 엄격히 준수하며 축조되다가, 임진왜란 이후 예서의 수정과 사회 변화 속에서 일반층으로 확산되며 간소화된 형태로 더 널리 조성되었다는 기존 연구 흐름과도 부합한다.
한편 내흥동유적에서는 분묘 조성 시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추정하기 위해 C구역 회묘에서 확인된 목관에 대해 연륜연대 측정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3호·10호·31호·34호 회묘 목관에서 <표 7>과 같은 분석 결과가 도출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형식별 조성 연대를 추정할 수 있었다. 즉 Ⅲ형식은 16세기 후반 이후, Ⅳ·Ⅴ형식은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5.
〈표 7〉의 결과를 바탕으로 C구역 회묘의 조성 양상을 살펴보면, 서쪽에서 조성이 시작되어 점차 동쪽으로 확대·이동하며 분묘군이 형성되는 경향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앞서 형식 분류를 통해 제시한 공간적 변이와도 대체로 부합한다. 또한 서쪽 일원에서 유물이 출토된 회묘가 확인되는 점은, 부장품의 박장화가 상대적으로 진행된 동쪽 일원보다 이른 단계의 조성 가능성을 시사하는 정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표 7〉 내흥동유적 C구역 목관 연륜연대 분석표
| 구분 | 연륜연대 | 방사성 탄소연대 | 형식 |
|---|---|---|---|
| 3호 | (AD 1822) | AD 1749-1771(46.2%), AD 1805-1825(49.2%) |
Ⅴ형식(19세기 초) |
| 10호 | AD 1735 | - | Ⅴ형식(17세기 중반) |
| 31호 | - | AD 1526-1546(0.9%), AD 1636-1696(44.7%), AD 1736-1816 (39.2%), 1936-현재(10.6%) |
Ⅳ형식(16~20세기) |
| 34호 | (AD 1570) | AD 1519-1619(76.4%), AD1659-1719(19.0%) |
Ⅲ형식(16세기 후반) |
종합하면 군산 내흥동유적은 조선시대 중·후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집단적으로 조성된 분묘군으로 평가된다. 회묘 구조에 근거한 형식 분류, 주변 유적과의 비교, 기존 연구성과와의 부합성, 그리고 목관에 대한 연륜연대 결과를 종합할 때, 내흥동유적 회묘는 대체로 16세기 후반 이후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내흥동유적 회묘는 사대부 생활권에 위치한 일부 지역을 제외한 지방권에서도 확인되는 회묘의 전개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향후 전북지역 회묘의 변천을 논할 때 재검토가 필요한 핵심 유적으로 판단된다.
5. 맺음말
군산 내흥동유적에서 확인된 회묘를 대상으로 형식 설정과 분류를 시도하고, 규모와 구조적 특징, 출토유물의 양상을 검토함으로써 회묘의 변천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내흥동유적 회묘군은 조선시대 중·후기 회묘의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아울러 전북지역 회묘의 변천에는 ‘지방’이라는 지리적 성격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이해된다. 회묘가 본래 왕실과 사대부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전북지역에서도 특히 전주·완주권을 벗어난 지역은 그 중심에서 상대적으로 멀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내흥동유적에서 다량의 회묘가 확인된 점은 전북지역 회묘 전개 양상을 재검토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군산 내흥동유적을 중심으로 회묘의 분포 현황과 구조·특징을 정리하고, 내흥동유적 회묘의 변천 양상을 검토하는 데 있었다. 더불어 최근 발굴 사례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연구가 상대적으로 미진한 회묘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자 하였다. 다만 계량적 통계분석을 통해 보다 객관적인 논지를 도출하고자 했으나, 자료 구성과 해석 과정에서 한계가 있었으며, 구조 분석에 비교적 중점을 둔 나머지 부장유물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비교분석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내흥동유적에서는 회묘뿐 아니라 다수의 조선시대 토광묘가 함께 확인되었다. 이는 내흥동유적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뿐만 아니라, 전북지역 및 더 넓게는 조선시대 중·후기 분묘 변천 양상을 논의할 때 반드시 비교·검토해야 할 과제로 판단된다. 향후에는 이러한 한계점을 염두에 두고 관련 자료를 추가로 취합·정리하여, 본고의 미진한 부분을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가고자 한다.
| 논문접수일: 2025. 08. 20. / 심사개시일: 2025. 11. 17. / 게재확정일: 2025. 12.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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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Discussion on Lime Burials from Gunsan Naeheung-dong Site
This study aims to clarify the attributes and scholarly significance of lime burials (hoemyo, 회묘, 灰墓) of the Naeheung-dong site during the Joseon Dynasty Korea. Archaeological data and research are still limited on this representative mortuary practice of Joseon. The lime burials from the Naeheung-dong Site in Gunsan, is this paper’s focus, comprehensively reviewing the burials’ distribution, structure, production method, and production dates. In this paper, the term “hoemyo” is used in a broader sense, to include not only the cases where lime (hoe, 회, 灰) was used to construct a coffin surrounding or enclosure (gwak, 곽, 槨), but also the cases where lime was applied only as an upper sealing layer (cheonhoe, 천회, 天灰) and when lime was used in small quantities during burial construction.
A total of 331 Joseon-period burials were identified from the Naeheung-dong site (272 earth-cut burials and 59 lime burials). The lime burials occur in site areas A, C, and D, with the highest concentration in area C (43 burials). They are arranged in linear rows along a particular elevation band on the hillside, and there are almost no overlaps between the lime burials’ distribution. This pattern suggests either a relatively short period of construction or the existence of spatially bound burial plots associated with a group (or between multiple groups). Furthermore, the choices of burial location and orientation appear to have been not strictly guided by ideal prescriptions of Neo-Confucian ritual manuals but rather prioritized pragmatic responses to local topography like ridgelines and slope conditions.
In terms of burial structures, the Naeheung-dong lime burials can be classified into Type III (10 burials), Type IV (37 burials), and Type V (12 burials). Among them, simplified forms predominate, characterized by reduced or partial use of lime. Some of these burials contain crushed shell mixed into the lime, implying the coastal environmental setting possibly influencing material choices. The use of a lime floor layer (jihoe, 지회, 地灰) is limited to seven burials (about 12%), potentially indicating lower social and economic status compared to the Jeonju–Wanju area of Jeolla Province. Grave goods were found in only two burials (including white-porcelain jars and bronze spoons), allowing some assessment of status differentiation among the burial plots. And this grave good assemblage is generally consistent with the broader post-Imjin War trends toward frugality in burial practices.
Dendrochronological data from wooden coffins and radiocarbon date analysis results suggest that Type III graves were likely constructed after the late 16th century, and Types IV and V burials probably being made after the mid-17th century. Taken together, the Naeheung-dong lime-burial assemblage provides significant evidence for understanding the development of lime-burial practices from the late 16th through the 19th century in the late Joseon period.
Key Words : Gunsan Naeheung-dong Site, Joseon-period burials, Lime burial (hoemyo), Sarye Pyeollam, Typology, Late Joseon, Dendrochron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