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초록
본고는 위봉산성의 축성 배경과 성격을 기존의 ‘경기전 태조어진 이안(移安) 산성’ 또는 ‘대외 관방거점’으로 환원하기보다, “전시 수도 전주 방어체제” 속에서의 기능으로 재위치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호란 이후 형성된 “도성 수비 불가—후방 보장”이라는 전략 전환과, 삼번의 난 전후 대외환경 속에서 전주를 축으로 한 방어 구상이 구체화되는 과정을 검토하고, 실록·비변사등록·읍지류 등 자료를 통해 전시 운영의 실제를 재구성하였다.
전주의 방어는 전주부성 ‘단일축’이 아니라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설계되었고, 그 중 위봉산성은 행궁·군기고·군향창을 갖춘 후방 방어의 핵으로서 전주부성의 취약을 보완하였다. 특히 삼번의 난 등 국제정세의 위기 속에서 위봉산성은 천연의 요새로서 해상—육상 피난의 종착지이자 국왕의 최후 피난처로 구축되었으며, 고군산진 등 서해 수군 거점의 강화와 결합해 후방 방어체제를 입체화하였다. 나아가 숙종 8년(1682) 위봉산성 축성 완료를 전후해 전라 수군 체
계가 재편되는 등 산성 보장체제와 해상 방어체제가 상호 연동되는 구조가 확인된다.
결론적으로 위봉산성 축성과 전시 수도 전주의 방어체계 구축은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경험 축적 위에서 삼번의 난과 국내 정치, 경신대기근 등 요인들이 중첩된 조건 속에 마련된 국가적 대비책이었으며, 조선후기 후방 보장 전략이 “지휘·상징의 보전과 이동”을 핵심 원리로 삼아 공간적으로 구현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주제어 : 숙종전주위봉산성고군산진후방 방어격포행궁
1. 머리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 지도자의 안위는 국가의 제일 관심사였다. 특히 왕조시대에 국왕은 곧 국가 그 자체였으므로, 평시에는 거둥·의식에 맞춘 호위 제도가 정비되고, 전시에는 국왕의 안전과 지휘의 연속성을 담보할 별도의 계획과 체계가 필수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이괄의 난을 거치며 조선은 수도 자체의 고수(固守)만으로는 국가 지휘 핵심을 보전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체감하였고, 유사시 국왕의 질서 있는 피난과 최후 항전 거점의 운용을 국가 전략의 상수로 삼았다. 이 맥락에서 행궁(行宮)을 갖춘 산성—남한산성·북한산성과 더불어—위봉산성이 지니는 의미가 도드라진다. 병자호란 이후 서울 이북 방어선의 취약이 확인되자, 전시 피난 수도의 물색과 산성 운영의 재설계가 불가피해졌고, 전라도 수부(首府) 전주가 그 축으로 부상하였다.
조선 후기 군사·외교 대비책에 대한 연구는 풍부하나,2 유사시 국왕 피난의 구체적 장소와 운용에 관해서는 성과가 드물다. 이는 국왕 안위와 대외관계를 아우르는 기밀성 때문에 직접 사료가 제한되는 탓이 크다. 위봉산성 또한 문헌상 ‘보장지처’로 간헐적으로 드러날 뿐, 수·개축 과정과 실제 운용을 복원할 자료는 빈약하다. 그럼에도 흩어진 편린(片鱗)을 이어 붙이면, 위봉산성이 조선 후기 최후 보루의 하나였음을 가늠할 수 있다.
위봉산성의 축조에 대한 해석은 선행연구에서는 대체로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변란 시 경기전 태조어진 이안을 위한 입보 산성이라는 견해로, 동학농민전쟁기에 실제 어진이 위봉산성으로 이안(移安)된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3둘째, 하삼도 관방정책의 일환으로 대외 위협(황당선·왜선)에 대비한 축성이라는 견해이다.4 다만 숙종 초 왜선 출현 소동이 유언비어였고,5 당시에는 초량 왜관 이전 교섭 등으로 대일관계가 비교적 안정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6 위봉산성의 의의를 단순한 대왜 방어거점으로 환원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선행 연구에도 불구하고 위봉산성 축성 배경과 목적에는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즉 위봉산성의 성격과 관련하여 단순히 경기전의 어진 봉안을 위한 입보 산성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국왕이 몽진하여 머무르는 행궁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할 것인지의 시각적 차이가 있다.
본고는 위봉산성을 “전시 수도 전주 방어체제” 속에서 재위치시킨다. 핵심은 전주부성 자체의 고수보다 지휘·상징의 보전과 이동을 전제로 하는 방어 운영이다. 전주부성은 구조적으로 방어력이 강한 성곽이 아니었고, 임진왜란기의 신속한 함락과 실록·왕실 상징의 이안은 이를 증명한다. 영조 대 비변사 회의에서도 위급 시 호남의 중군을 위봉산성으로 옮기고, 경기전 어진을 산성에서 보전하려는 방침이 공식 거론되었다. 나아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전주성 함락 직후 어진·신위의 위봉산성 이운이 실제로 단행되었다. 이 일련의 경험은 전주가 전란 시 공성(空城) 전략을 매개로 지휘·상징을 외곽 보장거점에 일시 이전하고, 산성망에서 전열을 재정비하는 운영 원리를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전주의 방어는 단일 성곽의 결사 방어가 아니라, 해안—근교—내륙을 관통하는 다층·분산형 네트워크였다. 서해 연안의 위도진·고군산진·격포진이 조운로와 상륙 축을 통제하는 수군 방어진을 형성하고,7 내륙에서는 북쪽 적상산성, 남측 입암산성·교룡산성·금성산성이 호남의 대로(大路)·요로(要路)를 차단하는 차폐선을 구성하였다.8 전주 근교의 위봉산성은 행궁·군기고·군향창을 구비한 후방 지휘·보장 핵으로 작동하며, 전주부성의 취약을 보완하고 내륙 산성군과 해안 진보를 결절로 묶었다.9 이처럼 육군과 수군이 상호 호응하고, 산성망과 진포망이 종심(縱深)으로 연동되는 구조 속에서, 전주는 정치·행정의 지휘 중추이자 왕조 정당성의 상징을 지키는 운영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 위에서, 위봉산성의 축성이 어떠한 국내외 정세와 운영 논리 속에서 선택·배치되었는지를 검토한다. 첫째, 정묘·병자 이후 형성된 “도성 수비 불가—후방 보장”이라는 전략 전환, 둘째, 삼번의 난 전후 대외환경과 남하 축 방어 구상의 구체화, 셋째, 전주를 축으로 어진 이안—산성 농성—수군 연계가 직조되는 전시 수도 전주 방어체제의 실제 운용을, 실록·비변사등록·읍지류 등 편린 사료로 재구성한다. 특히 ‘성공한 경험’의 재현성—분조·이안·산성 농성의 누적 경험—이 위봉산성 선택과 운영을 견인했다는 가설을 제시하며, 기존의 어진 이안론·대외 관방론을 보완하여 숙종대 전라도 수부 방어체제 형성의 구조적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다만 전주를 중심으로 육지와 해상의 방어체계의 구성, 군사운영, 전주부성의 전시 피난 대책, 중앙군의 후퇴 전략 등의 연구를 통해 전시수도 전주의 의미는 좀더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2. 전시수도 전주와 보장 체제의 역사적 전개
1) 정묘호란의 분조 경험과 전주
분조(分朝)는 위급 상황에서 국왕 또는 세자가 조정의 기능을 이원화하여 민심 수습과 군사 동원, 지역 통제를 수행하기 위한 비상 체제였다. 이 중에서도 전주(全州)는 조선 후기 분조의 중심지로 실제 선택되고 운영된 사례가 있으며, 이는 전주의 지리적·정치적·군사적 이점에 기초한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전주는 조선 개국 이래 태조의 본관지이자 경기전(京畿殿)이 위치한 ‘왕실의 성지’라는 상징성을 지닌 장소였다. 동시에 전라도의 중심에 위치하여 영남과 충청 지역을 아우르는 남부 행정·군사 네트워크의 결절점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며, 유사시 강도(江都)나 통영, 한산도 등 수군 기지로 연결되는 해상망과도 연계 가능하였다. 이러한 조건은 전주가 단순한 피난처를 넘어, 후방에서 실질적으로 조정 기능을 수행하는 분조의 거점으로 적합하다는 평가로 이어졌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구성된 광해군의 분조10는 전란기 조선 정부가 중앙 통치기능을 후계자 중심으로 분산·지속시키는 제도적 전례를 남겼고, 이는 훗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시기 피난 체계 구상의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실제로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자신은 강화도로 피신하고, 세자인 소현에게 분조를 구성하게 하였다.11 조정에서는 분조의 입지를 두고 검토한 끝에 전주가 최종 선정되었으며, 이는 군사력 동원 및 후방 민심 수습, 그리고 교통·지형상의 안정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였다.12
소현세자의 분조는 1월 24일 서울을 떠나 수원, 직산, 공주, 여산을 거쳐 2월 6일 전주에 도착하였다. 이후 전주에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하고 군량 징발, 의병 조직, 백성 위무 등 사실상 조정의 행정 기능을 독립적으로 수행하였다. 분조의 체류 기간 동안 김장생(金長生)은 양호호소사로서 전주를 중심으로 한 의병 동원에 협조하였고, 전라도·충청도 각지에서 지역 유력자들이 세자의 정통성을 인정하며 병력과 자원을 제공하였다.13 이처럼 전주는 단순한 체류지가 아니라 후방 통치의 실질 거점이자 정치적 정당성이 확보된 공간이었다.
분조는 후금군과의 강화가 체결된 직후 해산되었으나, 전주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평가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세자가 도중에 적의 침입 소식을 듣고, 전주를 떠나 남쪽으로 더 내려가야 할지 여부를 고심하였을 때 도체찰사 이원익은 통영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만 김장생은 전주 고수를 주장하며, 통영 이동이 오히려 분조의 안정성과 통치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14 결과적으로 세자는 전주에 머무르며 정묘호란기 후방통치 기능을 안정적으로 수행하였고, 이는 분조의 입지로서 전주의 적합성을 역사적으로 입증한 사례가 되었다.
조선 후기 국왕의 피난처, 보장처를 모색하는 논의에서도 전주는 적상산성과 위봉산성의 방어 체계 내 핵심 전환지로 간주되었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 적상산성의 독진화와 위봉산성의 축성은 전주를 내륙 중심 방어 체계의 심장부로 삼으려는 전략적 흐름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전주는 내륙과 해안, 북과 남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이자, 실질적인 행정 중심지로 기능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유일한 지역이었으며, 그 점에서 전시 피난 체계의 핵심 거점으로서의 전통은 정묘호란을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전주는 정묘호란기 분조의 거점으로 선택되어 조선의 전시 통치체제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는 단순히 지리적 이점만이 아니라, 역사적 상징성과 행정 중심지로서의 기능, 그리고 위급시 민심을 안정시키고 지역 기반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이 뒷받침된 결과였다. 전주는 이후 조선 후기 보장처 체계 및 산성 방어 체계 구상의 한 축으로서 역할을 지속하였으며, 분조와 피난의 복합적 거점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2) 도성수비 불가론과 후방 방어 체계의 구축
조선 후기의 수도 방어 전략은 정적 방어(靜的防禦)와 유동 방어(流動的防禦)를 병행하였다. 도성 내에 배치된 중앙군은 기동성과 실전력을 겸비하여 적의 침입에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편제되었고, 주요 산성들은 후방 지휘와 군량·군수 물자의 확보, 피란민의 수용 등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었다.15 이 과정에서 훈련도감과 금위영 등 중앙 군영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으며, 도성과 북한산성 또는 남한산성을 연계한 다중 방어선 체계도 부분적으로 논의되었다.16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의 수도 한양 도성은 더 이상 전시의 수비 거점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실질적으로 도성 수비를 불가능하다고 보는 이른바 ‘도성수비불가론(都城守備不可論)’은 17세기 중반 이후 조선 방어 전략의 대전제를 이루었으며, 이는 방어 체계의 중심을 도성 자체가 아닌 후방 보장지(保障地)로 이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은 도성 방어에 실패하였고, 이후 병자호란에서도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의 사례는 수도 내 방어 거점이 외적 침입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한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실제로 병자호란 직후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수도 방어력을 재편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전략적 실효성에 대한 회의는 여전하였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인조 즉위 직후 후금과의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 비변사 회의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회의에서 다수의 대신들이 도성 수비가 실질적인 방어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전시에는 국왕이 별도로 입보할 보장지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7
광해군 대에 이미 수도 보장지로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설정되었으며, 이는 북방으로부터의 침입 시 해도(海島)인 강화도로 피신하고, 남쪽 해안으로의 접근 시에는 산성(山城)인 남한산성으로 후퇴하는 이원적 방어 전략이었다.18 그러나 병자호란의 패배는 이 두 지역 모두가 결정적 위기 상황에서 조선 국왕과 조정의 신변을 보장해 줄 수 없는 취약한 거점임을 입증하였다. 특히 강화도의 방어 체계가 청군에 의해 단기간 내 점령된 사실은 해도 중심 보장 전략의 허점을 드러냈다.
이후 조선의 방어 전략은 점차 수도 방어를 포기하고, 특정한 전략적 산성에 군사력을 집중시켜 국왕과 중앙 정부가 유사시 피신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정엽, 정경세, 이정귀 등 일부 대신들이 도성 방어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나, 그들의 주장은 구체적인 군사 행정 조치로 이어지지 못하였으며, ‘도성수비불가론’이 실질적으로 지배적인 방어 논리로 정착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 수도 방어 전략은 두 가지 방향으로 구체화되었다. 하나는 도성 자체를 중심으로 훈련도감, 금위영 등 중앙군 편제를 통한 기동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사시 왕실과 조정이 피신하여 지휘할 수 있는 보장지를 후방에 설정하는 방식이었다. 전자는 삼군문(三軍門)의 기능 강화를 통해, 후자는 위봉산성, 적상산성, 대흥산성(大興山城) 등의 산성을 중심으로 한 축성 정책을 통해 구현되었다. 특히 숙종 대에는 삼번의 난을 계기로 외적의 침입 가능성이 다시금 부각되면서 수도권 방어 체계의 강화와 보장지의 재설정이 동시에 추진되었다.19
결국 조선 후기의 국방 정책은 수도 자체의 방어보다는 도성 방어의 한계를 인정하고, 후방 보장지를 중심으로 군사·행정 거점을 분산하여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정착되었다.
3. 삼번의 난 전후 대외 정세와 조선의 대응
1) 초량왜관 이전 설치와 안정적인 대일 외교
17세기 후반 조선의 대일 외교는 외형상 평온한 교린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일본의 정치·군사적 정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실용적이고 주도적인 전략 아래 안정적으로 관리되었다. 특히 현종 말기부터 숙종 초기에 이르는 시기는 삼번의 난(1673 ~ 1681)이라는 동아시아적 정세의 전환기와 맞물려, 조선이 일본과의 외교를 단순한 통교 이상의 안보 전략 자산으로 인식하게 된 전기라 할 수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기유약조(1609)를 통해 제한적, 제도적으로 복원하였으며, 이는 무역과 사행의 형식을 통해 형식적 예속성과 실질적 독립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17세기 중반 현종 대에 접어들며 이러한 기본 기조는 유지되면서도 일본의 내부 정세, 특히 기독교 단속 정책, 무역 확대 요구, 왜관 이전 문제 등 복합적 사안에 대한 대응 전략이 점차 정교해졌다.
1661년(현종 2) 대마도주는 조선에 기독교 신자 단속을 요청하는 서계를 보내왔다. 도쿠가와 막부가 기독교를 해외 세력과 연결된 반역 사상으로 간주하며 강력히 탄압하던 시기였으며, 조선 역시 국내로의 기독교 확산 가능성을 우려하며 이 요청을 신중히 수용하였다.20 이는 조선이 일본의 요청을 일방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일본 내 종교 정책이 조선 내부 질서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여 능동적으로 판단한 사례이다.
같은 시기 조선과 일본 간 최대 외교 현안은 왜관(倭館) 이전 문제였다.21 애초 두모포(豆毛浦)에 설치된 왜관은 조선이 일본의 활동을 통제하는 제도적 장치였지만, 1640년 이래 일본 측은 협소함과 항만의 불편함을 이유로 부산진성으로의 이전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부산진성이 동래 방어망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22 조선 조정은 이러한 일본 측 요구를 단순한 편의성 문제로 보지 않고 군사적 접근 가능성이라는 전략적 위협으로 간주했으며, 현종 연간 내내 외교적 마찰을 피하면서도 군사 안보를 우선시하는 절충적 대응을 지속하였다.
1671년(현종 12)에는 일본 사절단이 왜관 외부로 무단 이탈하여 동래부 관아를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조선 외교 질서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자 군사적 도발로 간주되었고, 조정은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였다.23 조선은 이를 계기로 일본 사절의 위협성을 다시 인식하고, 왜관 이전 문제의 결단이 필요함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조선이 일본을 단순한 통교국이 아니라 여전히 잠재적 군사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삼번의 난이 발발한 1673년(현종 14)은 조선이 대일 정책의 전환점을 맞은 시기였다. 청 내부의 내전 가능성이 대두되는 가운데, 조선은 대일 관계를 보다 안정적이고 제도화된 형태로 정비하려는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따라 조정은 같은 해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초량(草梁)으로의 왜관 이전을 결정하였다.24 이는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피하면서도, 군사적 방어선에서 일본인의 활동 반경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조선은 이전된 왜관의 위치와 구조를 자국의 통제력 범위 내로 두고, 통상·외교의 실무 역시 조선측 기준에 따라 운영되도록 설계하였다.
1678년(숙종 4) 초량왜관이 완공되면서 조선은 일본 사절의 체류 조건과 외교 절차를 더욱 엄격히 규정하였다. 일본 사절단은 국왕의 전패(殿牌)에 숙배(肅拜)한 후에만 외교 활동이 가능하였으며, 상주 인원과 거점 공간, 상행범위까지 세밀히 제한되었다. 조선은 이를 통해 일본과의 사행 교섭을 더욱 제도화하고, 외교의 주도권을 명확히 하려 하였다.25
17세기 후반 조선의 대일외교는 외형상 평화로운 교린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일본에 대한 통제력과 주도권을 공고히 하는 전략적 설계 하에 운영되었다. 조선은 일본을 과거의 침략자로 간주하기보다는, 청나라와의 복잡한 외교 질서 속에서 일정 부분 전략적 완충지로 활용할 수 있는 대상국으로 보았다. 이러한 인식은 일본과의 갈등을 피하면서도 통제를 강화하는 ‘제한적 안정화’ 전략으로 귀결되었다. 결국 초량왜관 설치는 단순한 공간의 이전을 넘어, 조선이 대일외교를 제도화하고 실리와 안보를 동시에 추구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2) 삼번의 난에 대한 조선의 인식과 대응
조선 후기 삼번의 난(1674 ~ 1683)은 오삼계(吳三桂), 경정충(耿精忠), 상가희(尙可喜) 등 명말 청초의 군벌들이 청나라 강희제의 철번(撤藩) 정책에 반발해 일으킨 대규모 내란으로, 조선에도 심대한 외교적, 군사적 영향을 끼쳤다. 운남의 오삼계는 1673년 11월 운남 순무 주국치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뒤, 장사(長沙)와 무창(武昌)을 점령했다. 이어 복건의 경정충, 섬서의 왕보신이 가세하고, 광동의 상가희는 소극적으로 동조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조정에 심각한 외교적 경각심을 일으켰으며, 조선은 삼번의 반란이 청 조정의 통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하에 상황을 예의주시했다.26
1674년 오삼계의 거병 직후, 청나라는 조선의 진위사 겸 진향사 파견에 맞춰, 조선에 조총 지원 및 병력 파병을 논의하였다.27 그러나 국상(현종, 인선왕후)을 겪고 있던 조선의 정세와 청의 자급자족 조총 체제 등으로 인해 강희제는 조총 요구를 유보하도록 명하였다.28 이와 관련해 조선 사신 홍만종(洪萬鍾)은 청의 요구가 외교적 관례를 넘어서는 것이며, 조정이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고 보고하였다. 당시 조선 비변사 내에서도 병력 파병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으며, 일부 조총 제공만을 논의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29
청은 조선이 정씨(鄭氏) 세력과 공모하고 있다는 소문을 경계하며 국경 방어를 강화하였다. 숙종 원년(1674) 조선과 청이 연계되어 있다는 풍문이 북경에 퍼졌으며, 오삼계가 조선과 정경과 연합하여 청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유포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이 대만 정씨 세력과 내통한다는 의혹을 증폭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고, 실제로 정씨 세력이 조선의 삿갓(笠帽)을 구매하여 조선 병사로 위장하고 전투에 참여한 사례도 보고되었다.30 청군은 봉황성, 개주위에 병력을 배치하고, 압록강 일대에 보(堡)를 신설하며, 동팔참(東八站) 일대의 방어를 강화하였다.31 조선에 대해서는 사신의 동향을 면밀히 감시하고, 소지품을 철저히 수색하는 등 외교적 통제를 강화하였다.32 1679년에는 우가장(牛家莊)에 보를 설치하여 조선 사신의 기존 노선을 차단하였다.33 이는 조선이 반란 세력과 연결될 가능성에 대한 경계심의 반영이었다.
한편 1674년 삼번의 난은 조선 조정에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 소식이 전해졌으며, 이에 따라 정보의 정확성과 신뢰성에 대한 우려도 병존하였다. 삼번의 난이 조선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현종 15년(1674) 3월 2일, 사은사로 청에 갔던 김수항의 수행 역관 김시징이 제출한 「청국사정(淸國事情)」을 통해서였다.34 이후 조정은 영의정 김수흥과 허적의 건의에 따라 7월 20일 민암과 목래선을 진위사로 파견하여 상황을 정밀히 탐지하려 했다.35
그러나 전황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대부분 사신단을 통해 단편적으로 전해졌고, 그것마저도 보통 4 ~ 5개월 정도의 시차를 두고 도착한 데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혼재되어 있었다.36
이 같은 불확실한 정보 환경 속에서 조선 조정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자 하였다. 일본 경유 정보는 오삼계 격문이나 정금(鄭錦)의 동향을 보다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채널로 여겨졌고, 대마도주는 삼번의 난과 정경의 움직임을 정기적으로 보고하였다.37 반면, 청을 경유한 공식 사신단의 보고는 종종 감시와 검열을 거쳤으며, 숙종 3년에는 조선 사신의 짐을 철저히 수색하고 동정을 감시하는 등 정보통제도 강화되었다.38
정보의 성격 또한 매우 혼재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삼번 세력의 활약을 강조하고 반청 정서에 우호적인 정보가 주를 이루었으나, 청군의 우세가 확실해질수록 전쟁 실상과 조선에 전해지는 정보 사이의 괴리가 커졌다.39 정경에 대해서는 한편으로는 정통 복명세력으로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조선을 침입할 가능성이 있는 해구(海寇)로 보는 이중적 시각이 존재하였다. 실제로 숙종 즉위년 9월에는 정경 세력이 한강에 출몰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한양에서 삼남까지 피난민이 속출하는 등 민심의 동요가 컸다.40
한편 삼번의 난은 조선 내에서 기존의 반청 복명(反淸復明) 정서가 재점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윤휴(尹鑴)를 중심으로 한 북벌론이 구체적인 정책 구상으로 발전하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윤휴는 삼번의 난을 “중화회복”의 기회로 인식하고,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주장하였다. 그는 병력을 동원하여 북경으로 진격하고, 정씨 세력과의 연합, 일본 및 중국 남부 세력과의 협력을 통한 청 타도를 주장하였다.41 윤휴의 상소는 단순한 이상론을 넘어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제시된 전시정책으로, 조총·활·화포로 무장한 1만 병력을 조직하고, 지패법 시행과 호포법을 통한 군비 마련, 도체찰사부의 설립과 같은 체제 개편까지 포함하였다.42 그는 밀소(密疏)를 통해 현종과 숙종에게 연이어 북벌의 시급성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조정 내에서는 이에 대한 찬반이 분분하였다. 예조판서 권대운은 청의 세력이 아직 강대하므로 오삼계의 의중이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현실론을 펼쳤고, 허적과 정치화는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여 북벌론의 공개 추진에 반대하였다.43 특히 숙종은 윤휴의 상소가 “재앙을 부를 언사”라며 강한 우려를 나타냈고, 결국 북벌론은 표면화되지 못한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44
3) 도성 방어를 위한 대흥산성의 축성과 강화도 진보 수축
조선은 북벌론과 같은 대외 공세적 구상보다는 수도와 인접 지역을 중심으로 한 철저한 수세적 방어체계를 구축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개성 지역에 축조된 대흥산성이다.
숙종 즉위 직후, 영의정 허적(許積)은 송도(개성) 북방의 천마산 일대를 순시하고, 산세가 험준하여 군사 방어에 적합함을 상주하였다. 그는 "형세가 지극히 좋아 나는 새도 지나가지 못할 곳"이라 하며 산성 축성을 주청하였다.45 당시 병조판서 겸 훈련대장이었던 유혁연(柳赫然)은 개성이 전략적 요충지이며, 지형적 조건과 군사 훈련, 백성 동원이 용이한 점을 들어 이 지역에 방어 거점을 조성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46 이에 숙종은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대흥산성 축성을 결단하였다.
반대 논리는 분명했다. 허목(許穆), 윤휴(尹鑴), 장선징(張善徵) 등은 숙종 즉위 초기라는 정치적 불안정, 흉년으로 인한 민심 이완, 청나라 칙사 내방과 천문 현상 등을 이유로 축성이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47 그러나 숙종은 삼번의 난이 발발한 중국 정세의 급변과 몽골 태극달자(太極達子) 세력의 동향을 언급하며 강행 방침을 고수하였다.48 축성의 목적이 북벌이 위기시 국왕 및 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보장처’로서의 기능에 있음을 분명히 한했다.
1676년(숙종 2) 3월 5일에 시작된 공사는 약 50일 만에 4월 26일 완공되었으며, 축성의 총책임자는 유혁연이었고, 파직 중이던 정유악(鄭維岳)이 서용되어 보좌하였고 정창도(丁昌燾)는 도청(都廳)으로 임명되었다.49 축성 완료 후 체찰사부(體察使府)가 설치되었고, 도체찰사로는 허적이 임명되었다.50 이는 단순한 축성이 아니라 군사와 행정이 통합된 방어본부를 개성에 설치한 것이며, 숙종은 이를 통해 수도 북쪽의 방어력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진 경신환국(1680)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은 대흥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절하하였다. 김석주 등은 “지형은 험하지만 평탄한 지대가 적어 남한산성처럼 유사시 임금의 장기 체류가 어렵다”고 비판하였다.51 그 결과 대흥산성은 국가적 피난처로서의 기능은 약화되었고, 인근 지역민의 일시 피난처나 기병대 주둔지로만 한정되었다.
대흥산성의 방어체계는 도성과 개성부의 직할 군정 재편성, 군기 이송, 둔전 편제 등의 조치로 이어졌다. 산성 내에 군기고가 설치되어 한성에 보관 중이던 조총 등 무기가 이관되었고,52 서흥·수안 등지의 둔전이 산성 관할로 이관되어 아병(牙兵) 체제로 편성되었다.53
결국 대흥산성 축성은 북벌론과 같은 공세적 명분에서가 아니라, 삼번의 난이라는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왕실과 수도 방어를 위한 내치 중심의 위기 대응책이었다.
한편 조선 인조 대 이후 국방 체계의 확립은 강화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재인식에서 출발하였다. 인조는 정묘호란 당시 후금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피신하여 위기를 모면하였고, 이후 조선 조정은 강화에 진보(鎭堡)를 집중적으로 설치하고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여 방어 체계를 강화하였다. 강화도의 방어 구도는 내륙에서 강화로 진입하는 경로를 통제하는 육상 방어와, 서해에서 접근하는 적에 대응하는 해상 방어라는 이중 체계로 구성되었다.
17세기 후반, 청에서 발발한 삼번의 난(1673 ~ 1681)은 조선 조정에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정경(鄭經)이 왜와 내통하여 서해로 침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첩보가 접수되면서, 조선은 국왕이 긴급 피신할 수 있는 보장처(保障處)를 새롭게 물색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54 당시 영의정 허적(許積)과 형조판서 오시수(吳始洙)는 강화를 국왕의 피난처로 삼기에는 해구(海寇)의 침입에 취약하다고 평가하였고,55 훈련대장 유혁연(柳赫然)과 어영대장 신여철(申汝哲) 또한 강화도의 한계를 지적하였다.56 이로 인해 조정 내에서는 강화도를 대신할 보장지를 모색하려는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그럼에도 숙종은 강화도의 군사적 중요성을 여전히 인정하며 기존 방어망을 정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였다. 숙종은 즉위 초부터 강화 갑곶진(甲串鎭)과 덕진(德鎭)을 중점 방어선으로 삼아 병력을 재편하고, 내륙과 해상을 연결하는 전략 거점을 확충하는 데 주력하였다.57 숙종 2년(1676)에는 강화유수 허질(許秩)의 제안에 따라 장곶보(長串堡)가 신설되었는데, 이곳은 외양(外洋)에 면하고 중국 본토를 마주할 수 있는 입지적 장점으로 인해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점으로 평가되었다.58 숙종 3년(1677)에는 전시에 대비하여 강화부 읍성을 대대적으로 개수하였다. 이때 성벽을 모두 석축으로 개축하고 외성을 확장하고 포루를 정비하여 방어력 향상을 도모하였다. 이듬해인 1678년에는 진무영(鎭撫營)을 설치하여 강화도 수비군의 편제를 일원화하고 상설화하였으며, 숙종 5년에는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의 건의를 받아들여 해안 일대에 48개소의 돈대(墩臺)를 신설함으로써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해상 방어망을 실질적으로 강화하였다⁶.
강화도 방어 체계는 단순한 성곽 중심의 수세적 방어에 그치지 않고, 육상 경로의 차단과 해상의 통제력을 동시에 구현하려는 전략적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강화부 읍성 개수와 진무영 설치, 해안 돈대 구축 등 일련의 조치등 강화도의 방어 체계 재정비는, 국왕의 피난처로서의 기능을 보완하는 동시에, 서해안 및 수도 외곽의 방어 능력을 강화하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4. 후방 방어책의 구상과 전시 수도 전주
1) 보장처로서 적상산성과 격포 행궁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국왕의 피난처, 즉 보장처(保障處)를 재정립할 필요에 직면하였다. 기존의 보장처로 간주되었던 강화도, 남한산성, 개성 대흥산성 등은 전란을 거치며 방어력과 지휘 지속 능력 측면에서 심각한 한계를 드러냈다. 이에 따라 국왕이 실제로 장기 체류할 수 있고 후방 병력 및 수군과의 연계가 가능한 새로운 전략거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 중심에는 무주의 적상산성(赤裳山城)이 위치하게 되었다.
적상산성은 광해군 대부터 그 지형적 우수성에 주목받았다.59 최현(崔晛)은 광해 4년(1612) 순무 도중 이곳의 방어 여건을 확인하고 실록각 설치를 건의하였으며, 이후 정묘호란 직후 인조에게 올린 만언소(萬言疏)에서는 "한강 이북은 이미 탕패한 땅이며, 남한산성은 고립된 독성(獨城)으로 주변의 성원을 받기 어렵다"며, 적상산성만이 삼남의 중간에 위치하며 식량과 물자, 인적 자원의 지원이 용이한 최적의 피난처임을 주장하였다.60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정축조약(丁丑條約)에 따라 도성 인근 산성의 수축이 불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방어체제는 하삼도로 내려가게 되었다.61 인조 17년에는 박황(朴潢)의 건의에 따라 무주·금산·진안 등 7읍을 적상산성의 속읍으로 소속시키고, 입암산성의 선례에 따라 승려 각성(覺性)에게 도총섭의 직책을 주어 성내에서 상주하게 하였다.62 이와 같은 방안은 단순히 산성 수비를 넘어서, 정규군과 불교계 승병이 연계된 복합 방어체제의 구축을 의미하였다.
적상산성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실제 보고는 인조 23년(1645) 봉교 이태연(李泰淵)에 의해 공식화되었다. 그는 성의 사면이 암벽으로 둘러싸여 적의 침투가 불가능하며, 성 내부에는 수십 개의 샘과 물길이 흐르고 있어 장기 체류에도 적합하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청주, 전주, 공주, 상주, 성주, 남원 등 삼남 각지와의 교통이 연결되어 후방 지원을 받기 용이함을 강조하였다.63
이후 현종 대에 전라감사 민유중(閔維重)은 적상산성을 독립된 진관으로 삼고, 사고·군기고·군량고 등의 재배치를 통해 국왕의 장기 체류를 가능하게 하는 실효적 보장처로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64 그의 건의에 따라 1674년 무주는 도호부로 승격되고, 수성장이 파견되며 성의 수축과 방호 책임을 공식적으로 부여받게 되었다.65
그러나 이와 같은 전략적 강화에도 불구하고, 적상산성의 보장처 기능에 대한 회의도 존재하였다. 한림 최후상(崔後尙)은 성이 험준하여 진입로가 북문 하나뿐이며, 외부의 군사적 성원이 도달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66 감사 조계원(趙啓遠)도 적상산성, 입암산성, 금성산성 등은 물이 부족하고 방어에는 적합하나 군영으로 활용하기에는 비효율적이라는 의견을 제출하였다.67
이와 같은 평가 속에서도 적상산성의 ‘요새로서의 입지’에 주목한 사대부 지식인들은 이 산성을 국가 보위의 관건으로 보았다. 송시열(宋時烈)은 "지금 나라가 평안하다고 하여 이곳의 관방을 등한히 여긴다면, 장수의 머리에 눈이 쌓일 정도로 한가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평시에도 경각심을 가지고 수축과 운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하였다.68 윤증(尹拯) 또한 “적상산성은 천연의 요새로서 산세가 하늘이 만든 것과 같고, 험준한 중에도 안은 평탄하여 성을 수축하고 병사를 주둔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칭송하였다.69 이는 적상산성을 단순 방어거점이 아니라, ‘전란 시 국왕 피란의 최후 보루’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적상산성의 독진화 논의는 숙종대까지 지속되었으나, 삼번의 난 발발 이후 숙종 즉위년(1675)에 위봉산성이 축성되면서 적상산성은 전략적 역할의 일부를 위봉산성과 분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상산성은 사고 보존 기능과 일부 후방 방어 기능을 지속하며, 실질적 보장처의 예비지로서 기능하였다.
결론적으로 조선 후기 적상산성은 단순한 실록 사고의 소재지가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의 외교적 제약, 국왕 피난 경로의 재편, 후방 통제체계 강화라는 맥락에서 구축된 보장처로서의 상징성과 실효성을 동시에 지닌 거점이었다.
병자호란은 조선 조정으로 하여금 기존의 보장처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하였다. 이 때 주목된 지역이 전라도 부안의 격포였다.70 격포는 내륙의 전주로 연결되는 육로와 서해를 통한 해상 교통의 접점에 위치해 있어, 국왕의 후퇴로를 보장하고 동시에 보급과 통신 유지에도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서해를 통한 긴급 피난과 전주로의 진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71 이러한 전략적 판단에 따라 1640년(인조 18) 1월, 순검사 박황(朴煌)의 건의로 격포진이 설치되었고,72 전라감사 원두표(元斗杓)는 인근 내륙에 위치한 적상산성(赤裳山城)의 수축을 함께 건의하였다.73 즉 격포와 전주, 적상산성을 연계한 후방 보장 체계의 구상이 이미 이 시기 형성된 것이다.
이에 따라 1641년(인조 19)에는 격포에 신설된 신영(新營)이 전라감사가 직접 겸관(兼管)하는 전주 관할 진으로 편제되었다. 이는 조정이 격포를 단순한 해상 방어 거점으로가 아니라, 국왕 피난 경로상의 핵심 기착지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조치였다. 결과적으로 강화도에서 격포 행궁74을 거쳐 전주로 이어지는 피난 경로가 이 시기에 확립되었으며, 이는 후방 보장 체계의 시초로 평가할 수 있다.
격포에 대한 이러한 전략적 인식은 이후 숙종대 최종 보장처로 위봉산성이 축조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삼번의 난이라는 동아시아 전체의 위기 상황은 보장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위봉산성을 새롭게 축조하였다. 위봉산성은 전주를 배후에 두면서도 천연적인 요새로 기능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어, 기존의 해상–육상 피난 루트의 종착지로서 국왕과 왕실을 보호하는 전략적 핵심이 되었다.
2) 고군산진의 강화와 위봉산성의 축성
조선후기 전라도 부안 고군산진(古群山鎭)은 단순한 수군 진영 이상의 전략적 거점으로 기능하며, 해상 방어체계에서 중요한 위상을 점하였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 국왕 피난처로서 강화된 위봉산성 및 적상산성과의 연계 속에서 고군산진은 후방 해상 방어선의 핵심으로 편입되었다. 고군산진의 군사적 가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란을 거치며 점차 부각되었으며, 그에 따라 진영의 설치, 지위, 병력 및 군선 배치 또한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75
고군산진은 인조 2년(1624) 부근 금강 하구의 군산진 외에 별도로 재설치되었다. 당시 소모별장이 파견되었으며, 수군 31명과 함께 방패선 1척이 운용되었다. 이는 병자호란 이전에도 이미 후방 해안 방어에 대한 체계적 고려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76 특히 정묘호란 직후인 인조 7년, 전라도 감사 권태일은 고군산진과 위도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여 양 섬을 연계한 해방책을 상신하였다. 그는 고군산이 수백 척의 군선이 정박할 수 있는 천연항만이며, 호서 지역과도 가까운 입지에 있음을 들어 별장의 직책을 승격시키고, 수군 지휘 기능을 강화할 것을 건의하였다.77 이는 고군산진이 단지 왜구에 대응하는 전통적인 해방 거점이 아니라, 내륙과의 연계, 대규모 함선 집결, 유사시 반격 및 퇴로 확보까지 고려한 전략기지로 인식되었음을 시사한다.
병자호란 이후의 국방 기조 변화 속에서도 고군산진의 위상은 계속 증대되었다. 인조 15년(1636)에는 기존의 방패선을 대신해 전선(戰船)을 배치하였고, 이듬해인 인조 16년에는 포수, 사부, 노군 등 전문 병종을 육성하는 방식으로 수군 병력을 크게 보강하였다.78 이러한 수군 강화는 단순한 연안 방어 차원을 넘어, 한강 이북의 방어체계가 붕괴된 상황에서 강도(江都,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국왕 피난 체계와 후방 방어를 위한 필수 조치였다. 특히 고군산진은 전라감사가 직접 위도에 진입하여 조정 명을 받드는 행위를 담당하였으며, 이는 군사적 요새로서의 역할을 넘어 정치적 중심 기능까지도 위임받았음을 보여준다.79
이와 같은 고군산진의 강화는 현종 말 숙종 초에 발생한 삼번의 난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당시 청나라 내부의 혼란과 대만 정씨 세력의 해상 위협이 병존하는 상황에서, 조선은 서해안의 해방체계를 강화할 필요에 직면하였다.80 이에 따라 숙종 즉위년인 1675년, 고군산진은 종3품 수군 첨절제사(僉節制使) 진으로 승격되었다.81 이는 그간 속진으로 간주되던 고군산진이 정식 첨사진으로 격상된 것이며, 당시 국가 차원의 후방 방어 전략에서 고군산진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 시기 고군산진은 객사, 동헌, 장대, 군기고, 화약고 등 총 30여 동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의 진영을 갖추고 있었다.82
숙종 8년(1682)에 이르러 위봉산성 축성이 완료되면서, 전라도 우수영 수군 체계는 대대적인 재편을 거쳤다. 이 시기 임치진, 가리포진 외에 위도진이 신설되어 3진관 체제가 성립되었고, 고군산진은 위도진 관할 하의 거진(巨鎭)으로 지정되었다.83 이러한 체계는 병자호란 이후 경직된 국방 기조 하에서, 변경 방어 대신 후방에 집중된 입체적 방어 전략을 구상한 결과였다. 이어 숙종 9년에는 우수영 수군 체계가 다시 정비되어, 가리포, 위도 등 2진관과 16개진으로 구성되는 전라 좌·우수영 이원체계가 본격적으로 확립되었다.
이처럼 고군산진은 조선 후기 전라 서해안 방어체계의 중심축이자, 단순한 연안 방어의 기능을 넘어서 보장처 방호, 수군 주둔, 해상 퇴로 확보라는 다층적 전략 구조 내에서 운영된 복합 거점이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군사적 위상이 점차 강화되었고, 숙종 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라 우수영 수군 체계의 핵심으로 편입되면서 전략적 가치가 공고화되었다.
위봉산성은 조선 숙종 대 삼번의 난 발발이라는 국제정세의 위기 속에서 국왕의 최후 피난처이자 전시 지휘 거점으로 축성된 대표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숙종 1년(1675) 전라감사 겸 전주부윤 권대재의 건의에 따라 축성을 시작하였으며, 숙종 7년(1681)에 완공되었다.84 이 산성은 전주부 동쪽 약 40리 지점의 험준한 위봉산 지형을 활용하여 축조되었으며, 외침에 대비한 후방 방어선 및 국왕의 보장처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설계되었다.
산성의 축성은 단순히 성곽을 쌓는 데 그치지 않고, 진(鎭)을 설치하고 행궁 및 군수물자 조달, 군액 편성 등 종합적인 군사·행정 시스템 구축으로 확장되었다. 위봉산성 방어체계는 전라 각 고을이 분담하여 운영하였으며, 이 중에서도 전주는 방어 체계 전반을 지휘하고 실질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85
위봉산성의 규모는 석축 둘레 약 5,097파(約9.2km), 높이 8척에 달하며, 성내에는 우물 45개소, 연못 9개소, 염산 1개소가 설치되어 전시에 필요한 수자원을 충분히 확보하였다. 주요 시설로는 행궁(6칸), 정자각(2칸), 좌우익랑(10칸), 내신문·외신문(각 3칸), 진무정(6칸), 진장비우헌(6칸) 등 군사 및 왕실 관련 건물들이 포함된다.86 이러한 건물 배치는 단순한 수성처가 아닌 국왕 피난 시 체류와 지휘 기능까지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행궁의 존재는 위봉산성이 국왕의 최후 피신처로 기능하도록 계획되었음을 보여준다. 행궁은 본체 6칸을 중심으로 정자각과 좌우익랑, 성문 및 부속시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사훈련과 행정업무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진무정, 교청 등의 공간도 확보되어 있었다.87
군사적 운용을 위한 군액은 정초군, 수첩군관, 산성군관, 별파군, 기패관, 파총, 초관 등 다양한 직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병력은 2,539명에 달했다. 이 중 전주가 담당한 병력은 2,129명으로 전체의 약 84%에 이르러, 전주가 위봉산성 방어체계의 핵심이었음을 입증한다.88
<표 1> 위봉산성 군현별 군종별 군액 배정표
| 천총 | 파총 | 초관 | 정초 초관 | 정초 파총 | 기패관 | 정초군 | 별파진 | 군 | 보군 | 수첩 군관 | 지구관 | 기고관 | 합계 | |
|---|---|---|---|---|---|---|---|---|---|---|---|---|---|---|
| 전주 | 2 | 3 | 20 | 48 | 2,054 | 1 | 1 | 2,129 | ||||||
| 금산 | 1 | 2 | 82 | 85 | ||||||||||
| 김제 | 1 | 1 | 3 | 2 | 111 | 118 | ||||||||
| 용담 | 12 | 11 | 23 | |||||||||||
| 임피 | 1 | 2 | 3 | |||||||||||
| 만경 | 18 | 18 | ||||||||||||
| 흥덕 | 1 | 29 | 30 | |||||||||||
| 장수 | 20 | 20 | ||||||||||||
| 진안 | 2 | 6 | 30 | 35 | 73 | |||||||||
| 고산 | 10 | 30 | 40 | |||||||||||
| 함계 | 2 | 3 | 22 | 1 | 1 | 58 | 2,201 | 53 | 20 | 111 | 65 | 1 | 1 | 2,539 |
전거 : 김철배, 「숙종대 전라도 위봉산성 축성과 행궁(行宮)의 위치 고찰」(『전북사학』 66, 전북사학회, 2022년)에서 재인용함
군사 시설 이외에도 전주, 익산, 김제, 임실, 진안, 고산, 금구 등지에서 군기고, 화약고, 군향창(軍餉倉) 등 군수 지원 창고가 성내에 배치되었다. 예컨대 전주는 군향 12칸, 교향창 3칸, 집물고 및 화약고 등을 담당하며, 군수 조달과 비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89 군향미는 10,675석 9말 4되, 콩 72석 14말 6되, 정조는 811석 4말 5되가 확보되었다.90
<표 2> 군현별 위봉산성의 수리, 군향, 군기, 군액 배정표
| 구분 | 수리차지 | 축성 | 군향 | 군향창 | 군기고 | 군기 | 군액 |
|---|---|---|---|---|---|---|---|
| 감영 | 3칸 | ||||||
| 전주 | 행궁 | 1,000파 | ○ | 12칸 | 집물고 3칸 화약고 3칸 | ○ | ○ |
| 금구 | 동문 | 597파 | ○ | 4칸 | 1칸 | ○ | ○ |
| 김제 | 800파 | ○ | 7칸 | 1칸 | ○ | ○ | |
| 임실 | 북문 | 650파 | ○ | 4칸 | 1칸 | ○ | ○ |
| 진안 | 600파 | ○ | 2칸 | 1칸 | ○ | ○ | |
| 익산 | 서문 | 800파 | ○ | 7칸 | 1칸 | ○ | ○ |
| 고산 | 장대 | 650파 | ○ | 4칸 | 1칸 | ○ | |
| 용안 | 미상 | 本寺 | ○ | ||||
| 함열 | 미상 | 本寺 | ○ | ||||
| 남원 | ○ | ||||||
| 금산 | ○ | ||||||
| 진산 | ○ | ||||||
| 만경 | ○ | ||||||
| 용담 | ○ | ||||||
| 임피 | ○ | ||||||
| 장수 | ○ | ||||||
| 흥덕 | ○ | ||||||
| 태인 | ○ | ||||||
| 합계 | 5,097파 | 7읍 | 7읍 | 17읍 | |||
| 근거 | 호남진지 | 여지도서 | 호남읍지 | 호납읍지 여지도서 | 호납읍지 여지도서 |
전거 : 김철배, 「숙종대 전라도 위봉산성 축성과 행궁(行宮)의 위치 고찰」(『전북사학』 66, 전북사학회, 2022년)에서 재인용함
전주는 산성 내 주요 건물 관리와 성첩 수리를 비롯해 방어 전반의 통제를 담당하였으며, 전라 각지의 고을들은 각기 분담된 영역과 물자 수송, 군기 운영을 통해 전시 방어 시스템의 일익을 맡았다. 이처럼 위봉산성은 군사·행정·물자·지휘 체계가 유기적으로 구성된 산성으로서, 후방에서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는 피난처이자, 전시 통합 지휘기능을 수행하는 거점으로 작동하였다.
5. 맺음말
조선후기 전시 수도 전주의 방어체계 구축과 위봉산성의 축성은 국내외의 다양한 위기와 정치적·사회적 상황 속에서 마련된 국가적 대비책이었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괄의 난을 경험하며 국왕의 피난처와 국가의 최후 방어 거점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숙종 초기에 위봉산성은 국왕의 안전을 도모할 피난처로 설계되었으며, 행궁을 설치해 단순한 지역 방어 이상의 전략적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삼번의 난, 적상산성 수축, 경신대기근, 갑인예송, 홍수지변 등의 요인이 작용했다.
삼번의 난은 청나라 내부의 혼란을 의미하며, 청조의 철번 정책에 반발한 오삼계 등의 난이 발생하면서 청나라의 군사적 불안정성이 조선에 전해졌다. 이로 인해 조선 조정은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군사적 대비를 강화하게 되었고, 이는 위봉산성 축성의 주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삼번의 난은 청 내부의 분열을 일으키며 조선 내 일부 신하들에게 북벌론을 자극하기도 했으나, 조선은 실질적으로 청과의 관계 악화를 피하고 안정적인 방어 태세를 마련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하게 되었다.
한편 국내적으로 갑인예송과 홍수지변 등으로 인해 남인과 서인 간의 갈등을 드러내며 조정 내부의 갈등이 심화된 상황에서 대흥산성과 도체찰사의 운영을 북벌의 준비태세 마련이라는 것은 공세적 군사 전략을 펼칠 수가 없게 되었다.
적상산성 수축과 위봉산성의 축성도 당시 조선의 방어체계 구축의 맥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적상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조정에서 논의되며 국왕의 피난처로서 검토되었으나,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외부의 지원을 받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이에 조정은 적상산성을 보장처로 지정하고 수축했지만, 유사시 국왕의 피난처로서 한계가 드러났다. 반면 위봉산성은 지리적 접근성이 좋아 삼남 지역의 군수 지원과 물자 조달이 용이해 왕권 보호를 위한 새로운 피난처로 결정되었다.
위봉산성에는 행궁이 건설되어 유사시 국왕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전주는 후방 방어 체계의 중심지로서 군수 물자 조달과 함께 위봉산성은 주요 군현들이 분담해 방어 체계를 유지하고, 전주를 중심으로 방어 인력을 집중하여 효율적인 전시 대비를 가능하게 했다.
이처럼 전주와 위봉산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 체계는 조선 후기 국왕 보호와 국가 안보의 필수적 대비책으로 마련되었다. 위봉산성은 전란 발생 시 왕권을 보호할 최후의 보루로 기능했으며, 전주를 중심으로 한 방어와 군수 체계는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위봉산성 축성은 국왕의 안전과 국가의 안정을 보장하려는 조선의 의지를 반영하며, 대내외 위기에 대응하는 전략적 대응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 있다.
위봉산성의 축성은 단일 성곽의 방어력 강화나 특정 상징물의 보존이라는 차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으며, 도성 수비의 한계를 전제로 국왕의 신체·지휘·왕조 상징을 분리·이동·재결합시키는 조선 후기 전시 운영 논리의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본고가 사용하는 ‘전시 수도 전주’란 유사시 국왕의 체류와 조정 기능의 지속, 왕조 상징의 보전, 그리고 해상·내륙 방어망의 연동이 가능한 복합 거점을 의미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위봉산성은 적상산성·강화도·대흥산성 등 기존 보장처와의 상대적 비교 속에서 선택된 하나의 산성이 아니라, 고군산진·격포진·전주·내륙 산성군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후방 방어체제의 핵심 결절로 자리매김된다.
다만 본고는 문헌 사료를 중심으로 이 체제의 윤곽과 형성 논리를 재구성하는 데 주력한 만큼, ‘전시 수도’ 개념의 이론적 정식화, 보장처 간 상대평가의 지표 설정, 실제 운용 단계에서의 동원·보급·지휘 절차, 그리고 공간 배치와 운영 논리의 결합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향후 추가 사료의 발굴과 미시적 분석을 통해 보완되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그럼에도 본고는 위봉산성 축성을 단일 사건이 아닌 숙종대 후방 보장체제 형성의 한 국면으로 위치시키고, 전라도 수부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시 방어 운영의 구조적 실체를 제시하는 데에 그 의의를 둔다.
논문접수일: 2025. 11. 03. / 심사개시일: 2025. 11. 17. / 게재확정일: 2025.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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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Institutionalization of Jeonju’s Wartime-Capital Defense Architecture and the Fortification of Wibong Mountain Fortress under King Sukjong of Joseon
The defensive system centered around Jeonju and Wibongsanseong in the late Joseon period was a national countermeasure established in response to domestic and international crises and political-social circumstances. Having experienced the Imjin War, the Manchu invasions, and Yi Gwal's Rebellion, Joseon recognized the necessity of a royal refuge and ultimate defensive stronghold. During the early years of King Sukjong’s reign, Wibongsanseong was designed as a royal sanctuary, with the construction of a royal palace (haenggung) adding strategic significance. This was influenced by events such as the Revolt of the Three Feudatories, the reconstruction of Jeoksang Fortress, the Gyeongsin Famine, the Gapin Royal Mourning Dispute, and severe floods.
The Revolt of the Three Feudatories, a period of internal strife within the Qing Dynasty, heightened military instability and prompted Joseon to strengthen its defenses. While Jeoksang Fortress was considered as a royal refuge after the Manchu invasions, its rugged terrain made external support difficult, exposing its limitations. Conversely, Wibongsanseong, with its accessibility and efficient logistical support, was chosen as a new royal sanctuary. Jeonju served as the hub for military supplies and personnel concentration, while Wibongsanseong functioned as the ultimate bastion for protecting royal authority in times of war.
This defensive system, centered on Jeonju and Wibongsanseong, exemplified Joseon’s strategic intent to safeguard the monarchy and ensure national stability. It was a critical response to internal and external crises, reflecting the kingdom's determination to prepare for any threats.
Key Words : King SukjongJeonjuWibong Mountain FortressGogunsan Naval Garrisonrear-area defenseGyeokpo Temporary Royal Palace
각주
- 이 논문은 (2024)년 전북연구원 전북학연구센터의 (전북학 학술연구)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
- 이왕무, 「조선시대 軍事史의 회고와 연구 동향」, 『조선시대사학보』, 조선시대사학회, 2023. ↩︎
- 박대길,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과 태조 어진의 위봉산성 보존」, 『전북사학』 56, 전북사학회, 2019. ↩︎
- 김철배, 「숙종대 전라도 위봉산성 축성과 행궁(行宮)의 위치 고찰」, 『전북사학』 66, 전북사학회, 2022. ↩︎
- 『숙종실록』 권1, 숙종 즉위년 9월 4일(을축) ↩︎
- 장순순, 「조선후기 왜관의 성립과 왜관정책」, 『인문과학연구』 31, 2011. ↩︎
- 『숙종실록』 권13, 숙종 8년 9월 4일(무신) ↩︎
- 『조선시대사찬읍지』 및 각 군현 읍지(입암·금성·교룡·적상산성 관련 군현조): 산성진 편성·수성 체계 기록. ↩︎
- 『완산지』(전주), 『조선시대사찬읍지』: 위봉산성의 행궁·군창·군기고 등 시설과 전주부 중심의 분담 운영 기사. ↩︎
- 임진왜란 때 광해군 분조의 활동과 의미에 대해서는 손종성, 1993, 『임진왜란시 분조에 관한 연구』(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과 하태규, 「임진왜란기 광해군의 전주에서의 분조 활동」(『역사와담론』 106, 2023)에서 구체적으로 논증했다. ↩︎
- 성당제, 「정묘호란시 소현분조와 세자의 역할」, 『규장각』 31, 2007, 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 ↩︎
- 『인조실록』 권15, 인조 5년 1월 13일(기축). ↩︎
- 『소현분조일기』 권1, 천계 7년(1627) 1월 26일(갑오); 송준길, 『동춘당집』 권21, 「諡狀」 <김장생 시상> ↩︎
- 송준길, 『동춘당집』 권21, 「諡狀」 <김장생 시상> ↩︎
- 심승구, 「19세기 전반 군영의 변동과 수도방위체제의 변화」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1998. ↩︎
- 이태진, 「삼군문 도성 수비체제의 확립과 그 변천」 『한국군제사-근세조선후기편』, 33, 1977; 오종록, 「조선후기 수도 방위체제에 대한 일고찰」 『사총』 33, 1988. ↩︎
- 『인조실록』 권5, 인조 2년 3월 16일(경오) ↩︎
- 나경준, 『조선후기 전란과 국가전략』, 선인, 2019. ↩︎
- 나경준, 『조선후기 전란과 국가전략』, 선인, 2019. ↩︎
- 『현종실록』 권6, 현종 2년 7월 무신 ↩︎
- 조선후기에 왜관을 두모포에서 초량으로 이전하기 위한 약 30여년에 걸친 8차 교섭 과정과 성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윤용출, 「17세기 중엽 두모포 왜관의 이전 교섭」(『한국민족문화』 13, 부산대학교한국민족문화연구소, 1999)을 참조할 수 있다. ↩︎
- 『현종실록』 권18, 현종 11년 3월 3일(경신) ↩︎
- 『현종실록』 권22, 현종 12년 10월 3일(기사) ↩︎
- 『현종개수실록』 권26, 현종 14년 4월 2일(신축) ↩︎
- 초량 왜관의 설치는 현종말 숙종대의 대일외교의 자신감 속에서 성립한 것이고, 그 결과 조선정부는 왜관 경영과 통제에 보다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임한 것으로 보고있다.(장순순, 「조선후기 왜관의 성립과 왜관정책」 『인문과학연구』 31,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
- 『숙종실록』 권1, 숙종 즉위년 11월 23일(임오). ↩︎
- 『숙종실록』 권1, 숙종 즉위년 11월 7일(병인); 『비변사등록』 제31책, 숙종 원년 3월 20일. ↩︎
- 『동문휘고』 보편 권1, 「使臣別單一·【甲寅】進賀兼冬至行書狀官 洪萬鍾 聞見事件」. ↩︎
- 『숙종실록』 권1, 숙종 즉위년 11월 13일(임신); 『숙종실록』 권1, 숙종 즉위년 11월 23일(임오). ↩︎
- 『숙종실록』 권3, 숙종 원년 4월 3일(신묘); 『숙종실록』 권4, 숙종 원년 6월 3일(경신). ↩︎
- 『숙종실록』 권1, 숙종 즉위년 11월 23일(임오); 『숙종실록』 권2, 숙종 1년 1월 16일(을유); 『비변사등록』 제31책, 숙종 원년 5월 19일. ↩︎
- 『숙종실록』 권6, 숙종 3년 3월 18일(갑오); 손만웅, 『연행록전집』 권28, 「야촌선생문집 권지4·연행일록」. ↩︎
- 『통문관지』 권9, 「숙종대왕 5년 기미」. ↩︎
- 『현종실록』 권22, 현종 15년 3월 2일(병인). ↩︎
- 『현종실록』 권22, 현종 15년 7월 5일(임오). ↩︎
- 『숙종실록』 권4, 숙종 1년 6월 일(경신). ↩︎
- 『숙종실록』 권14, 숙종 9년 12월 22일(기미); 권15, 숙종 10년 2월 21일(정사). ↩︎
- 손만웅, 『연행록전집』 권28, 「야촌선생문집 권지4·연행일록」. ↩︎
- 이재경, 『三藩의 亂 전후(1674 ~ 1684) 조선의 정보수집과 정세인식』,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13 ↩︎
- 『현종실록』 권22, 현종 15년 8월 3일(갑오); 『숙종실록』 권1, 숙종 즉위년 9월 4일(을축). ↩︎
- 『현종실록』 권22, 현종 15년 7월 1일(계해); 『숙종실록』 권3, 숙종 1년 4월 3일(신묘). ↩︎
- 이선아, 「윤휴의 북벌론과 그 추진 정책에 대한 검토」, 『한일관계연구』 18, 2003. ↩︎
- 『숙종실록』 권1, 숙종 즉위년 11월 13일(임신); 『숙종실록』 권5, 숙종 2년 12월 23일(신미). ↩︎
- 『숙종실록』 권1, 숙종 즉위년 12월 10일(경인). ↩︎
- 『숙종실록』 권1, 숙종 즉위년 11월 23일(임오). ↩︎
- 『숙종실록』 권2, 숙종 1년 1월 17일(병자); 『숙종실록』 권2, 1월 22일(신사) ↩︎
- 『승정원일기』 250책, 숙종 2년 1월 11일(갑오); 『숙종실록』 권4, 숙종 1년 9월 23일(무신); 『숙종실록』 권4, 숙종 10월 13일(정묘); 『숙종실록』 권4, 숙종 10월 15일(기사). ↩︎
- 『숙종실록』 권4, 숙종 1년 11월 12일(병신) ↩︎
- 『숙종실록』 권5, 숙종 2년 1월 12일(을미); 『승정원일기』 250책, 숙종 2년 1월 23일(병오). ↩︎
- 김종수, 「조선의 왕권과 숙종초기 도체찰사부 군사」, 『조선시대사학보』 98, 2016. ↩︎
- 『숙종실록』 권5, 숙종 2년 4월 13일(을축); 『숙종실록』 권5, 숙종 2년 4월 25일(정축); 『숙종실록』 권7, 숙종 4년 4월 2일(신미). ↩︎
- 『숙종실록』 권5, 숙종 2년 4월 25일(정축). ↩︎
- 『숙종실록』 권5, 숙종 2년 4월 13일(을축). ↩︎
- 『숙종실록』 권5, 숙종 2년 2월 15일(정묘); 『비변사등록』 32책, 숙종 2년 3월 11일. ↩︎
- 『숙종실록』 권1, 숙종 즉위년 11월 13일(임신); 『승정원일기』 224책, 숙종 1년 1월 25일(갑신). ↩︎
- 『숙종실록』 권4, 숙종 1년 7월 27일(계축). ↩︎
- 『숙종실록』 권1, 숙종 1년 1월 24일(계미); 『승정원일기』 224책, 숙종 1년 1월 25일(갑신); 『승정원일기』 260책, 숙종 3년 6월 25일(경오); 『비변사등록』 33책, 숙종 3년 7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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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상산성의 자연 지형과 규모 및 축성 시기에 대한 것은 박대길, 「무주 적상산성 축성 시기 고찰」(『대동사학』 5, 대동사학회, 2005)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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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실록』 권36, 인조 16년 1월 30일(경진); 『인조실록』 권36, 인조 16년 2월 7일(신축);『인조실록』 권36, 인조 16년 3월 5일(무진). ↩︎
- 『인조실록』 권39, 인조 17년 10월 8일(신묘); 『인조실록』 권40, 인조 18년 5월 21일(신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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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종개수실록』 권14, 현종 7년 2월 23일(갑술) ↩︎
- 『현종실록』 권21, 현종 14년 12월 21일(병진); 『적성지』 권1, 「무주도호부」. ↩︎
- 『현종개수실록』 권14, 현종 7년 2월 23일(갑술) ↩︎
- 『효종실록』 권13, 효종 5년 8월 24일(신사); 『효종실록』 권14, 효종 6년 4월 17일(신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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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증, 『명재유고』 권1, 시 「赤裳山城」 ↩︎
- 격포행궁, 격포진의 설치의 배경과 의의를 제시한 글로는 김철배, 「조선 후기 격포행궁(格浦行宮) 조성과 변천 연구」(『디지털문화아카이브지(Journal of D-Culture Archives)』 7-2, 전북대학교 문화융복합아카이빙연구소, 2024)와 김철배, 「조선 후기 전라도 蝟島鎭·格浦鎭 설치와 관방체제 변화」(『전북사학회』 69, 전북사학 2023)가 있다. 즉 진관체제 재편에 따른 관할 이전(부안→전주)·감영 체계 정비와 함께, 연해 읍성이 ‘증축’에서 ‘현상유지·축소’로 전환된 양상을 밝혀 서해 연안 첨사진 설치의 배경과 함의를 제시했고 전란 대비형 ‘격포행궁’이 병자호란 후 청의 조병·입조 요구라는 국제 정세 속 설치된 것으로 보았다. ↩︎
- 격포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비변사인인방안지도>, 『호남지도』(규12155- v.1-7) 「격포진도(格浦鎭圖)」 참조. ↩︎
- 『인조실록』 권40, 인조 18년 1월 30일(임오); 『승정원일기』 1007책 영조 22년 8월 2일(을축) ↩︎
- 『인조실록』 40권, 인조 18년 1월 6일(무오); 『인조실록』 권42, 인조 19년 1월 28일(갑진) ↩︎
- 격포 행궁의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강흔(姜俒), 「격포행궁기(格浦行宮記)」(『해동문헌총람』)에도 잘 드러나 있다. ↩︎
- 김종수, 「군산도와 고군산진의 역사」 『전북사학』 37, 전북사학회, 2010 ↩︎
- 『여지도서』 「만경 고군산진지」; 『대동지지』 「만경」 ↩︎
- 『인조실록』 권20, 인조 7년 3월 15일(신미). ↩︎
- 『승정원일기』 인조 16년 2월 5일(기해); 김종수, 「군산도와 고군산진의 역사」 『전북사학』 37, 전북사학회, 2010 ↩︎
- 『효종실록』 권13, 효종 5년 8월 24일(신사). ↩︎
- 송기중, 「17세기 수군 방어체제의 개편」 『조선시대사학보』 53, 2010 ↩︎
- 『고군산진지급사례성책』 「연혁」 ↩︎
- 『고군산진지급사례성책』 「공해」 ↩︎
- 『숙종실록』 권13, 숙종 8년 9월 4일(무신). ↩︎
- 『숙종실록』 권1, 숙종 1년 11월 23일(임오); 『숙종실록』 권38, 숙종 7년 9월 3일(임진). ↩︎
- 『조선시대사찬읍지』 29, 전라도 6, 완산지 관방; 『완산지』(1871). ↩︎
- 『한국지리지총서』 4, 전라도 1, 읍지, 4, 위봉진사례. ↩︎
- 전북문화재단·완주군, 『위봉산성지표조사보고서』, 2003, 65쪽. ↩︎
- 『완산지』, 『조선시대사찬읍지』 29, 전라도 6 완산지 관방. ↩︎
- 『조선시대사찬읍지』 29, 전라도 6, 완산지 관방. ↩︎
- 『湖南邑誌』(1847년, 韓14-52,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고려대학교해외한국학자료센터), 全州 關防. ↩︎
- Researcher, Institute for History and Culture Studies, Duksung Women’s Universit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