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北學硏究 제16집(2025)  ·  The Journal of Jeonbuk Studies, Vol.16(2025)   |   2025년 12월 31일, 177-198쪽   |   DOI: https://doi.org/10.59592/JBST.2025.16.7

해방 이후 권력 투쟁과 전라북도 지역 질서의 재구성1

- 남원사건을 중심으로 -
송정현2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연구교수

국문초록

본 연구는 해방 직후 전라북도 사회의 권력 구조 재편 과정을 1945년 11월 발생한 남원사건을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다. 해방 직후 미군은 남한 점령과 군정 수립을 추진하였으나, 지역마다 상이한 사회·경제적 조건과 권력 질서를 마주하게 되었다. 전라북도는 곡창지대로서 일제강점기 식량 수탈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빈번한 소작쟁의와 농민들의 사회적 갈등으로 좌익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조건은 해방 이후 권력 공백기에 지역 사회 권력 질서의 재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남원사건은 미군정과 인민위원회 간의 갈등이 폭발적으로 표출된 사례였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의 행정·치안 기능을 해체하고 적산 처리 권한을 장악하려 하였고, 이에 반발한 주민 시위 과정에서 미군의 발포로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사건의 배경에는 단순한 좌우 대립뿐 아니라 경제적 이해관계, 적산 처리 문제, 친일 청산 요구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였다.

사건 이후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잠재적 위협으로 규정하고 경찰과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통치 기반을 강화하였으며, 친일 협력 세력의 재등장과 좌우 대립의 격화를 초래하였다. 이에 따라 남원사건은 해방 직후 전라북도 사회의 권력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분기점이자, 한국 현대사에서 권력 재편의 특수성과 한계를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본 연구는 남원사건을 통해 중앙 정치 구도에만 국한되지 않는 지역 사회 내부의 권력 관계와 변화의 중요성을 밝힘으로써 해방 공간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고자 한다.

주제어 : 미군정기전라북도남원사건인민위원회적산

1. 서론

해방 직후 미군은 남한 점령을 신속히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진주 이전에 확보한 정보와 실제 현지 상황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고, 그로 인해 군사력 배치, 점령 완료 시점, 군정 운영 인력 확보 등에서 지역마다 차이가 발생하였다. 특히 미군이 지방에 진주했을 때 마주한 권력 질서와 사회·경제적 조건은 결코 동일하지 않았다. 일본인과 지역 유지의 관계, 인민위원회의 활동, 경제 상황 등은 지역별로 서로 다른 양상을 보였다.

미군은 군정 통치에 필요한 인력 차출과 지역 사정 파악을 위해 자문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통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지역 권력관계는 자연스럽게 재편되기 시작했다. 과거 식민권력을 통해 성장한 이들에게는 권력 연장의 기회가 주어졌고, 기존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권력 질서로 진입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전라북도는 한반도 서남부의 곡창지대로 만경강과 동진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와 수리 시설 덕분에 높은 농업 생산력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일제강점기에 식량 수탈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미 한일병합 이전부터 전북 지역에 대거 이주해 전주–군산 도로와 군산항을 거점으로 쌀을 대규모 반출하였다. 동시에 전라북도는 토지 문제로 인한 소작쟁의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농민들이 직접 갈등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모순은 좌익 세력 성장의 기반이 되었고, 이는 해방 이후의 정치 상황에도 긴밀히 연결되었다. 따라서 전라북도는 미군정 초기 복잡한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1945년 11월 발생한 남원사건은 해방 직후 권력 질서의 혼란과 재편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는 지역 전체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데 치중해 왔으며, 개별 사건을 통해 구체적인 권력 이동과 사회 변동을 분석한 시도는 부족하였다. 이와 관련된 선행 연구로는 여운모가 남원 지역의 좌우 대립 양상을 분석하며 사건을 조명한 바 있고, 박재호는 전라북도 좌우익 활동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남원사건을 일부 다루었다. 또한 송정현은 해방 직후 미군정과 지역 사회의 갈등 맥락 속에서 남원사건을 분석하였다.3 이들 연구는 대체로 사건 전개 과정이나 좌우 이념 대립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지역 사회 내부의 경제적 이해관계나 친일 청산 요구와 같은 복합적 요인들은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

이에 본 연구는 해방 직후 전라북도에서 권력 구조가 어떠한 방식으로 재편되었는지를 남원사건을 사례로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해방 직후 지역 사회가 맞이한 권력 공백과 사회 동향, 그리고 미군 진주와 군정 통치의 기반 형성 과정을 함께 검토한다. 이러한 맥락을 전제해야만 남원사건을 단순한 지역적 충돌이 아니라, 해방 직후 전라북도 사회의 권력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구조적 사건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원사건의 분석을 통해 미군정과 지역 사회의 갈등, 그리고 그 속에서 드러난 권력 구조의 변화와 역사적 맥락을 밝힘으로써, 해방 직후 한국 사회가 직면했던 권력 재편의 특수성과 한계를 규명하고자 한다.

2. 미군의 전라북도 배치와 통치 기반 형성

해방 직후 전라북도는 일제의 붕괴로 기존의 통치 체계가 해체되면서, 일시적인 권력 공백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지역은 혼란과 긴장이 공존하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미군은 전단을 통해 곧 있을 진주와 통치 방침을 예고하며 질서 유지를 촉구하였고, 민간에서는 일본인과 식민 통치 기구를 대상으로 한 일련의 공격 행위가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자치적 통치의 시도라기보다는 억눌린 감정의 분출과 일제 잔재에 대한 상징적 청산의 성격이 짙었다. 결국 전라북도 사회는 해방의 환희와 불안이 교차하는 과도기적 국면에서, 미군의 진주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군 진주는 해방 이후의 혼란 속에서 새로운 통치 권력의 등장을 의미했다. 남한 전역에 걸쳐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미군의 진주는 단지 군사적 점령에 그치지 않고, 행정과 치안, 경제의 운영 주체로서 미군정이 지역 사회에 실제 개입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전라북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며, 미군의 도착과 함께 기존 식민 권력의 공백을 메우는 새로운 행정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Ⅲ장에서는 미군이 어떻게 전라북도 지역에 통치 기반을 구축해 나갔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표 1> 전라북도 미군 배치 현황

부대배치 일자주둔 지역관할 지역
96군정단1945.11.17전북도청군정중대 전체 관할
29군정중대1945.10.21전주전주에 사령부 설치
56군정중대1945.10.23군산군산, 옥구 관할
64군정중대1945.10.24남원남원, 임실, 장수, 순창 관할
48군정중대1945.10.25전주무주, 금산, 완주, 진안 관할
44군정중대1945.11.14정읍부안, 고창, 정읍 관할
28군정중대1945.11.26전주익산에 재배치

출처: 송정현, 「미군정의 지방 통치 연구(1945-46)」, 전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73쪽 재인용.

위 표는 전라북도에 주둔한 미군 부대들의 배치 현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배치 규모와 공간적 분포를 파악할 수 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개별 부대의 이동 경로, 도착 시점, 담당 지역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전라북도에 가장 먼저 도착한 부대는 29군정중대로 인천을 출발해 육로를 통해 전주에 도착하였으며, 1945년 10월 21일자로 전주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지역 접수에 들어갔다.4 이어 하루 간격으로 56군정중대와 64·48군정중대가 각각 전라북도 내 주요 거점에 배치되며, 본격적인 미군정의 지역 점령이 시작되었다.

56군정중대는 1945년 8월 26일 캘리포니아 몬테레이 요새에서 오티스(Otis P. Hornaday) 대위를 지휘관으로 하여 12명의 장교와 60명의 사병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9월 21일 오전 6시에 몬테레이 기지를 떠나 기차로 스톤맨 캠프에 도착한 뒤, 9월 26일 다시 출발하여 수송선 팰콘함을 타고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후 10월 23일에는 군산에 배치되어 옥구 지역까지 관할하게 되었다.5

다음으로 64군정중대는 인천에 도착한 후 기차를 이용해 전주역을 거쳐 최종 배치 지역인 남원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남원에 본부를 설치하고 임실·장수·순창 일대를 관할하였다.6 이 부대는 특히 군정 인력들의 복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주 3회의 영화 관람 시간을 운영하였으며, 지역 내 우수한 음식점을 찾아 회식 장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7 이러한 조치는 낯선 지역 환경에 배치된 병사들이 초기 정착 과정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48군정중대는 10월 말 전주에 도착해 본부를 설치하고 무주·금산·완주·진안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어 44군정중대가 11월 14일 정읍에 배치되어 부안과 고창을 담당하였다. 마지막으로 11월 17일에는 96군정단이 전라북도에 도착하여 28군정중대와 교체하였다. 이에 따라 28군정중대는 26일 익산에 재배치되었으며, 같은 날 오후 5시 96군정단에 업무 인계를 한 뒤 이동을 완료하였다. 이로써 전라북도 내 미군 부대의 배치는 1945년 11월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무리되었다.8

전라북도에는 총 1개의 군정단과 6개의 군정중대가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 28군정부대는 1945년 9월 2일 필리핀 루손의 안티폴로(Antipolo) 기지에서 편성되었으며, 11명의 장교와 37명의 사병, 그리고 별도로 선발된 2명의 통역관으로 구성되었다. 부대는 10월 2일 오후 1시 LST 522함에 승선해 다음 날 마닐라만(Manila Bay)에 도착한 뒤, 수송선을 통해 10월 20일 오후 8시 인천항에 상륙하였다. 특히 통역관을 별도로 두었다는 점은 부대 창설 단계부터 한국어 소통과 행정 운영을 고려했음을 보여준다.9

미군 진주가 임박하자 전라북도 당국은 이에 대비한 준비에 나섰다. 특히 다른 지역과 달리 미군에게 제공할 「관내상황(管內狀況)」이 작성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관내상황은 각 부·읍·군의 현황을 종합한 일종의 지역 안내서로 전주남중학교 교장 히다 요네사쿠(肥田米作)가 책임을 맡고, 군산과 전주에서 영어가 가능한 인사들이 번역 작업을 담당하였다. 이와 더불어 유곽, 양식당, 일본 요리점과 같은 편의 시설이 계획에 포함되었으며, 미군 진주 이후 예상되는 야간 통행금지에 대비해 전력 및 경비 전화망 확보, 통행증명서 발급, 식량 배분 대책 등이 마련되었다.10 전라북도 지역민들이 미군 진주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전라북도 경무과장 아마기 이사오(天城勳)의 수기를 통해 엿볼 수 있다.11

미군이 진주하자 전라북도 조선인들은 대환영을 했다.

(중략)ⵈ전라북도는 남조선의 농업지대로 기후도 온화하고 평화로운 지방이었다.

따라서 인심도 부드럽고 종전 후 예상된 사회적 혼란도 적다.

위 사례는 경무과장의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에 불과하므로 이를 곧이곧대로 수용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실제로 전라북도에서도 일본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공격 사건은 분명히 존재하였다.

미군이 진주 초기에 맞닥뜨린 전라북도의 현실은 적산이나 통치권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본인의 본국 귀환과 더불어 해외에서 유입된 난민 문제도 심각했다.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로 식량과 의류는 크게 부족해졌고, 병원조차 기본적인 의료 장비와 물품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 정부를 안정적으로 수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최소한의 생활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 과제였다. 이에 미군정은 일본군 제복을 의류 대용으로 활용하게 하고, 엑스레이 필름과 백신 등 긴급 의료 자원을 지역 병원에 공급하는 조치를 취했다.12

사진

[사진 1] 전라북도 미군정

전라북도의 지형은 서부의 금강과 만경강 유역, 동부의 금강 상류 지역, 그리고 섬진강 상류의 동남 지역으로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 전북평야는 다시 서부 평야 지대와 동부 산간 지대로 나눌 수 있다.14 인구의 약 80%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주요 생산 작물은 쌀이었다. 미군 부대가 도착했을 당시에는 벼 수확기와 맞물려 식량은 비교적 충분한 상태였다. 그러나 문제는 쌀을 교환할 수 있는 생필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지역 경제는 심각한 불균형에 놓여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군정 활동에도 큰 장애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지역적 불균형과 생활 여건의 어려움은 군정 운영에도 즉각적인 해결 과제를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1945년 11월 20일, 갤러기(Ralph F. Gallogy) 중령이 전라북도 군정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행정 운영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문단을 두었는데, 일제강점기 광산부장을 거쳐 해방 직전 도지사의 고문을 지낸 윤상희(尹相曦)가 한국인 고문으로 기용되었다. 아울러 갤러기는 지역 내 주요 세력을 아우르기 위해 한국인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위원회 인원은 군정장관과의 면담을 거쳐 선발되었으며, 이들에게는 지역 사회를 대표하고 군정과 협의할 권리가 주어졌다.15

군정장관 임명과 더불어 치안 조직의 정비도 진행되었다. 전라북도 경찰부장에는 일본 사관학교 출신의 김응조(金應祚)가 임명되었고, 그 결과 기존 경찰부장이던 호시데(星出)는 해임되었다. 이어 10월 17일부로 일본인 경찰관 전원이 일괄 파면되면서, 식민지 경찰 체제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다만 전라북도 경무과장이었던 아마기 이사오(天城勳)는 한 달간 고문 자격으로 잔무 처리와 사무 인계를 담당하며 제한적으로 남게 되었다.16

치안 조직의 재편과 더불어 행정 기구의 구조 또한 파악되고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종전 당시 전라북도의 조직은 총 다섯 개 부서로 편성되어 있었다. 내무부에는 지방과, 사회과, 학무과, 노무과, 회계과가 있었고, 경찰부는 경무과, 경비과, 통신과, 보안과, 정보과, 위생과, 경제경찰과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었다. 이어 농상부에는 농무과, 식량과, 토지개량과, 농산과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광공부에는 광공과, 산림과, 기술과가 존재하였다. 마지막으로 재무부는 직세과, 간세과, 이재과로 이루어져 있었다.17

미군의 진주 이후, 전라북도의 기존 행정 부서는 군정의 필요에 따라 신설·개편되었다. 미군은 점령 초기 남한 사회의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통치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고자 하였으나,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았다. 전술 부대에서 민간 행정을 담당할 군정부대로 체제가 전환되는 동안, 지방에서는 이미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자치 조직들이 실제적인 통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군이 진주한 초기 몇 달 동안 중앙 차원의 통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지방 군사정부는 독자적인 운영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에 따라 미군정은 지역별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지방의 경우 주둔 인원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부 지역까지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지방 통치는 체계적인 운영보다는 기본 질서를 유지하고 긴급 사태에 대응하는 데 우선이 두어졌다. 이러한 질서 유지 방식은 곧바로 대민 관리와 직결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미군정의 지방 통치는 제한적이고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지역 사회와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표출되었다. 남원사건은 이러한 충돌이 집약적으로 드러난 대표적 사례였다.

3. 남원사건(1945.11.15)과 지역사회 질서의 재편

종전 직후 일본인과 조선인 관료들 또한 지역 행정의 변화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총독부 보안과에서 전해진 종전 소식은 전라북도 고등경찰과장 야마자키 후쿠오(山崎褔男)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이를 즉시 경찰부장 호시데 도시오(星出壽雄)와 경무과장 아마기 이사오(天城勳)에게 보고하였다. 같은 날 도지사 정연기(鄭然基)18는 뗄감 공출 독려를 위한 도내 출장을 예정했으나 취소하였다.

8월 15일 정오, 도 간부들은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들은 직후 곧바로 종전 처리와 대비를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력서·인사 관계 서류·경리 관계 서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문서를 각 부서 재량에 따라 소각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곧 도청 내 각 부서를 시작으로 전주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편 도내 각지에는 유언비어와 해방 소식이 적힌 벽보가 무질서하게 붙기 시작하자, 이를 방지하고 단속하기 위한 인원도 긴급히 조직되었다. 도는 최소 5명에서 최대 30명으로 구성된 단속반을 각지에 파견했으며, 전주에 본부를 둔 제233부대 또한 무주·진안·금산·장수에 각각 20명씩을 배치하였다. 이어 20일에는 순창과 임실에도 소부대가 파견되었다.19

벽보가 난무하던 거리에는 일장기에 감청색을 덧칠해 급히 만든 태극기를 든 주민들이 흰옷 차림으로 운집하였다. 8월 16일에는 일제강점기 신간회 활동이나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전주 풍남초등학교에서 부민대회가 열렸다. 교정에는 수만 명의 군중이 모여 해방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으며, 배은희(裵恩希)20 목사를 비롯한 다수의 지역 인사들이 연단에 올라 연설을 이어갔다. 대회 종료 후 배은희·이주상(李周相)·정우상(鄭遇尙, 변호사)·최홍렬(崔鴻烈, 1945년 전국 인민위원회 전북대표위원)·오명순(吳明淳, 언론인) 등은 풍남동 최한규(崔漢圭, 전국 인위 대표자 대회 전주지부 대표위원)의 자택에 모여 전주임시시국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위원장에는 배은희, 부위원장에는 유직양(柳直養, 한민당 전북지부장·양조업), 총무부장에는 인창섭(印昌燮, 대지주·한민당 전북지부 총무부장), 재무부장에는 백남혁(白南赫, 대지주)이 선출되었으며, 산하에는 치안을 담당할 전주청년단이 결성되었다.21

8월 20일, 백용희(白庸熙)를 중심으로 한 38명의 인사가 모여 전라북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지부장에는 최홍렬, 임원으로는 김철주(金鐵柱, 전국 인위 전북대표위원), 최한규, 송모(宋某, 전주 지역 송병우로 추정됨) 등이 선출되었으며, 전라북도 내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였다.22

전북도인민위원회는 약 6,000명으로 구성되었고 각 군 인민위원회는 30명에서 100명 규모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의 지역은 인민위원회 산하에 농민조합과 청년단체를 두고 있었다.23 8월 16일 전주에서 임시대책위원회가 발족되자 곧바로 전주청년단이 조직되어 치안 업무를 담당하였고, 이어 건국준비위원회 산하에는 청년대와 학도대가 설치되었다.24 군산에서는 약 200여 명의 청년이 치안대를 구성해 사무소를 열고 지역 질서 확보에 나섰으며, 옥구군 역시 면 단위 청년들을 동원해 자체적으로 치안 유지 활동을 전개하였다.25 이처럼 전라북도 전역에서는 인민위원회 산하 조직들이 치안과 질서 유지를 실질적으로 담당하며, 일시적인 권력 공백을 메워 나가고 있었다.26

지방 인민위원회의 조직은 해방공간이라는 특수한 맥락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해방공간은 새로운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염원이 분출된 장소이자, 일제강점기 동안 억눌려 왔던 조선인의 감정과 욕구가 응집된 공간이었다. 해방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고, 이에 따라 정치적 참여 역시 급격히 확대되었다. 지방 인민위원회는 지역 차원에서 치안을 유지하고 질서를 확립하면서 미군 진주 이전까지 사실상의 지방 통치 기구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적이고 실질적인 운영 조직에 불과했을 뿐, 합법적 절차를 거쳐 성립한 기구는 아니었다.

해방 직후 전라북도의 인민위원회는 단순한 자치 기구를 넘어 치안 유지, 행정, 적산 관리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특히 지역 청년단체와 농민조합을 기반으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며, 미군 진주 이전까지는 지역 사회의 사실상 통치 주체로 자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력은 미군정의 공식 행정권 수립과 직접적으로 맞물리면서 갈등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인민위원회가 담당하던 치안과 적산 관리 권한이 군정 체제하에서 경찰과 행정 관료로 이관되자, 지역 권력 구도는 충돌을 피하기 어려웠다. 전라북도에서 발생한 남원사건은 이러한 긴장의 집약적 표현이자, 미군정과 지역 사회 간 권력 재편 과정에서 나타난 대표적 사례였다.

남원은 동쪽으로 운봉, 서쪽으로 순창, 남쪽으로 구례, 북쪽으로 임실과 접하며,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경계에 위치한 고장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울과 연결되는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었고, 전주·남원·순천·여수를 잇는 국도가 정비되면서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남원은 전북 동남부의 물자와 인력이 모이는 집산지로 기능하였다. 해방 직후에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남원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진

[사진 2] 김응조(金應祚)

남원은 미군정과 인민위원회 간의 갈등이 극적으로 표출된 지역이다. 남원사건은 1945년 11월 15일, 전북 경찰부장 김응조가 무장 경관명을 인솔해 남원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남원사건의 발달은 1945년 11월 15일, 전북 경찰부장 김응조가 무장경관과 MP를 인솔해서 남원군인민위원회의 사무실인 군청회의실을 포위하고 남원군인민위원 간부 김창한·박종암(朴鍾岩)27·양판권(梁判權)28·강흥주(姜興周)·노재룡(魯載龍) 등 주요 인물들을 검거하면서 시작되었다.29 당시 남원 보안서장이 이들을 즉시 검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응조가 보안서장을 폭행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30

<1> 1945년 11월 15일 오후 1시경, 전라북도 경찰부장 김응조는 무장한 MP·MG 약 40여 명을 인솔하여 남원군 인민위원회를 습격함. 위원장 양판권, 부위원장 김창한, 박종암, 강흥주, 노재룡 등 5명을 공개 구타·포박 후 전주로 압송. 군청 내 노동조합, 농민조합, 해방청년동맹 등을 포위하고 간판·서류·물품 압수.

<2> 청년들이 김응조 부장의 귀로를 차단, 권총을 탈취하고 불법 검속에 항의, 지도자 석방 요구. 김응조는 모호한 발언으로 회피, 청년들은 즉시 석방 약속을 현장에서 확보.

<3> 11월 16일 밤부터 17일 오후 1시까지, 남원군민 약 2만여 명이 다음 요구를 걸고 대규모 시위 진행: ➀ 불법 검속자 즉시 석방, ➁ 인민위원회 해체 반대, ➂ 비민주 경찰 파면 요구. 대표로 양기봉, 황승태, 황의정, 김흥수 4인 선출.

<4> 미군정 측은 2분 내 해산 요구 및 무력 진압 경고. 군중은 이에 강하게 반발, 해산하지 않음. 미군정은 실탄 발사, 다음 3명 즉사: 한성배(18, 남원군 이백면), 박병갑(25, 남원군 산동면), 김성철(30, 임실군 지사면). 이후 무력 진압 지속, 50여 명 이상 희생 발생.

<5> 민중 대표 중 양홍주가 보안서장에게 치료비·조위금 지급 요구, 그러나 대표 4인 포함 5명 추가 검거, 그 외 지도자 25명 대량 검속.

<6> 당국은 인민위원회 관련자 전원 검거 목표로 수사 확대 중.

갈등의 발단이 어느 쪽에 있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사건이 남원 인민위원회 해산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당시 미군은 지역 인민위원회가 담당하던 치안 및 재산 관리 권한을 이양받고자 했으며, 이러한 과정이 갈등의 세부적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원 인민위원회의 간부 김창한은 제64군정중대 사령관 벤튼(Benton) 중령과 면담을 가졌다. 그는 미군 진주 이전에 이미 일본인으로부터 재산 처분권을 위임받았다는 점을 들어, 귀속재산의 미군정 이양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미군이 지속적으로 재산 이양을 요구하자 인민위원회 측은 군정에서 부착한 포스터를 훼손하는 등의 방식으로 반발하였다.31

검거 직후 김응조는 남원소학교에 주민들을 집합시킨 뒤, 이승만 박사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연설에 불만을 품은 남원 청년 30여 명은 전주로 복귀하던 김응조 일행을 가로막고 체포된 다섯 명의 석방 확인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응조가 이를 거부하자 청년들이 그를 구타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격화되었다.32

이 사건으로 당일 저녁 남원에 추가 병력이 배치되었고, 다음 날에는 16명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이에 반발해 남원에는 주민들이 모여 검거된 5명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반복된 해산 명령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사건 직후 현지 조사를 위해 파견된 조사단은 병원에 입원 중이던 김응조를 찾아가 체포 사유를 확인하였다.33 아래는 조사 과정에서의 김응조 진술 내용이다.

남원 인민위원회를 남원 인민의 총의(總意)로 볼 수 없다. 그들은 번번히 친일파를 배격하는데 일제강점기 동안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던 사람이 없고 납세하지 않았던 사람이 없으니 조선 사람 삼천만이 다 친일파로 볼 수 있다.…(중략)남원인민위원회는 해방청년동맹, 노동조합, 건국군 등 숱한 단체들을 만들어서 조선민족의 통일을 방해하였다. 그들을 검거한 단적인 이유이다.…(중략)전북지역의 다른 인민위원회도 이러한 태도로 나간다면 강경하게 대응할 작정이다.

위와 같은 김응조의 발언은, 당시 남원에서 벌어진 충돌이 단순한 행정적 문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권력 및 이해관계의 충돌임을 시사한다.

실제로 그의 진술 이전, 사건 관계자였던 남원보안서장 정성봉(鄭成鳳)의 경우에는 “모 정당의 간부 서○와 윤○의 사건이 파급된 것 같다”고 진술하였다. 이어 직접 출동한 김응조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인민위원회에서는 농민과 노동자에게 태업(怠業)을 권고하였고, 학도들에게는 등교를 막았으며, 세금 납부와 소작료 지불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와서 보니 그러한 일은 없었으므로 안심이 되었다. 다만 MP와 함께 출동한 체면상 검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다른 위원이 오면 석방하겠다.”34고 하였다.

이러한 관계자들의 진술은 남원사건이 단순한 불법 집회나 행정 집회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 이 사건의 배경에는 보다 구조적이고 복합적인 갈등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남원사건은 크게 두 가지 요인이 맞물려 있었다. 하나는 미군정과 남원 인민위원회 간의 갈등이며, 다른 하나는 친일·반민족 행위 청산 문제였다.

우선 인민위원회와 미군정의 갈등은 적산 처리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미군정은 안정적인 지방 통치를 위해 적산을 접수해야 했고, 인민위원회는 이를 거부하며 독자적으로 관리하려 했다. 이는 단순한 이념 대립을 넘어, 다양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로서 지역 권력 구도의 충돌을 불러온 직접적 요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주목할 점은 친일 청산 문제였다. 김응조에 대한 남원 주민들의 시각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는 그가 일제강점기 동안 친일적 행적을 보였다는 의혹과 맞물려, 해방과 함께 표출된 대중적 분노로 나타난 것이다. 남원사건은 미군정과 인민위원회 간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 내부에서 친일 협력자에 대한 청산 요구가 겹쳐지면서 갈등이 증폭된 사례였다. 다시 말해, 친일 처리 문제는 사건 전개 과정에서 독립된 요인이면서 동시에 다른 갈등과 결합하여 사태를 더욱 격화시켰다.

남원사건에서 드러난 친일 청산 요구는 특정 지역의 우발적 분노에 그치지 않았다. 미군정은 안정적인 행정 운영을 이유로 일제강점기 관리들을 대거 재임용하였고, 이는 곧 지역 사회의 불만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전라북도 군정청에서는 해방 이후에도 친일 혐의가 있는 관리들이 별다른 절차 없이 지위를 유지·허용받는 경우가 이어졌다(1946.7.19. 보고).35

특히 일제 시기 경찰로 재직했던 한국인 약 8,000명 가운데 5,000명가량이 미군정에 의해 재임용되었으며, 이는 전체 경찰의 약 80%에 달했다.36 이러한 조치는 행정 효율성의 필요로만 설명될 수 없는 문제였으며, 결과적으로 지역민들에게는 친일 청산의 좌절로 비쳤고,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남원사건은 전라북도 지역에서 미군정과 인민위원회 간의 갈등이 폭발적으로 드러난 계기였다. 사건 이후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단순한 자치기구가 아닌 잠재적 위협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경찰 조직을 동원해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제한하고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정책을 강화하였다. 이는 남원사건이 단순한 지역적 충돌이 아니라, 전라북도 전체에서 권력 질서 재편을 가속화하는 분기점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미군정은 인민위원회가 담당하던 치안·행정·교육·적산 관리 등 기능을 점차 경찰과 행정 관료 체계로 흡수하면서, 지역 사회의 권력 구도를 군정 중심으로 재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민위원회의 존재는 점차 제약을 받았으며, 그 활동 범위는 제한적이고 불안정한 상태로 축소되었다. 동시에 우익 세력과 친일 경력 관리들이 미군정의 비호 아래 행정 권력의 일부를 다시 장악하게 되면서, 좌우익 세력 간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곧 구체적인 탄압 사례들로 확인된다. 군산, 임실, 김제, 남원 등지에서 인민위원회의 활동은 경찰과 군정의 개입으로 차례로 제약되었으며, 이는 남원사건 이후 전라북도 사회 질서가 미군정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 군산에서는 인민위원회 구성원들이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포스터를 게시하고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해당 지역의 경찰은 군산인민위원회 사무실을 급습하여 공산주의 관련 문학작품도 몰수하였다.(1946.1.25.)37

<2> 임실에서는 군정이 1946년 3월 13일 임실인민위원회에서 주관하고 있는 어린이 한국어 학교를 폐쇄하였다. 폐쇄 이유는 교육당국의 허가 없이 운영되고 있다는 점과 공산주의적 사상을 가르치고 보급하고 있다는 것이다.(1946.3.26.)38

<3> 김제에서는 해당 지역의 인민위원회 소속 40여명이 경찰서로 향했고, 해당 경찰서는 병력 증강을 요청한 사건이 발생했다. 병력 증강 없이 무리는 해산되었다.(1946.3.26.)39

<4> 남원에서는 좌익과 우익간의 정치관련 회의를 허가받는 일로 며칠 동안 사소한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 일로 회의에 대한 허가는 무기한 연기되었다.(1946.5.31.)40

전라북도는 남원사건이 발생한 지역이었기에 이후 전개된 일련의 탄압 사례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남원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청은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잠재적 불온 세력으로 간주하고, 집회와 정치 단체 활동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한층 강화하였다. 특히 집회 허가와 정치 관련 회의는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이는 지역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정치 참여의 공간을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미군정은 각 지방 인민위원회가 인공을 중앙정부로 승인하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따라서 인공의 세력을 약화시키면 지방의 동향도 자연스럽게 소강 상태로 전환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미군정은 인공과 지방 인민위원회를 변혁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우호적이며 대체 가능한 정치 세력을 물색하였다. 그 결과 선택된 세력이 바로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중심으로 한 보수 우익 세력이었다.41

4. 결론

해방 직후 한반도는 승전국인 연합국과 패전국 일본, 그리고 새로운 독립국가를 열망하는 한국인이 뒤엉킨 복잡한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오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염원이 분출되었고, 재조일본인들은 안전한 귀환과 자국에 유리한 종전 처리를 우선시하였다. 한편, 연합국의 점령군은 남한 점령 계획을 구체화하며 진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처럼 남한 사회는 점령군, 한국인, 일본인 세 집단의 이해와 움직임이 교차하는 불안정한 과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 전라북도는 일제의 붕괴로 인한 권력 공백 속에서 혼란과 불안이 교차하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일본인과 식민 통치 기구에 대한 공격, 귀환 문제로 인한 혼란, 생활 물자의 부족 등은 지역 사회를 압박하였다. 이 속에서 인민위원회는 치안과 행정, 적산 관리 등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며 일시적으로 지역 통치 주체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는 미군정의 공식 행정권 수립과 불가피하게 충돌하였고, 양자의 권력 관계는 긴장과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미군정과 인민위원회 간의 갈등은 남원에서 극적으로 표출되었다. 전북 경찰부장 김응조는 남원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해산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이에 반발한 주민들이 시위를 벌였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미군이 발포하여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미군 측 보고서는 이 사건의 원인을 남원 지역 귀속재산을 인민위원회로부터 이양받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규정하였다. 즉, 적산 처리와 행정 권한을 둘러싼 미군정과 인민위원회 간의 갈등이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진 것이다

남원사건은 이러한 긴장이 폭발적으로 표출된 사례였다. 미군정과 인민위원회의 갈등은 적산 처리와 치안 권한 문제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일제 협력 세력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감과 친일 청산 요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건은 단순한 지역적 충돌이 아니라, 해방공간에서 권력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계기였다.

사건 이후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잠재적 위협으로 규정하고 경찰과 행정 관료 조직을 통해 그 기능을 흡수·제한하였다. 동시에 우익 세력과 친일 경력 관리들이 미군정의 비호 속에서 행정 권력을 다시 장악하게 되면서, 좌우익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결과적으로 남원사건은 해방 직후 전라북도 사회의 권력 재편 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사건은 미군정 통치가 지역 사회에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충돌이자,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직면했던 권력 구조의 모순과 한계를 드러낸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남원사건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사실은 해방 직후 지역 사회의 권력 재편이 단순히 좌우 이념 대립의 결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다. 경제적 이해관계, 적산 처리 문제, 그리고 친일 청산에 대한 지역민의 요구가 복합적으로 얽히며 충돌을 빚어냈다. 이는 해방 공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앙의 정치 구도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내부의 권력 구조와 그 변화를 분석하는 작업이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남원사건은 바로 그 과정에서 지역 사회가 겪었던 갈등과 재편의 단면을 드러내며, 한국 현대사의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로 남는다.

논문접수일: 2025. 10. 29. / 심사개시일: 2025. 11. 17. / 게재확정일: 2025.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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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ost-Liberation Power Struggles and the Restructuring of Local Order in Jeollabuk-do

- The Case of the Namwon Incident -

Song Jeonghyun42

This study analyzes the reconfiguration of local power structures in Jeollabuk-do during the immediate post-liberation period, focusing on the Namwon Incident of November 1945. Following Japan’s surrender, the U.S. military government sought to establish its occupation and administrative system in southern Korea, but encountered diverse local socio-economic conditions and preexisting power relations. As a major granary region, Jeollabuk-do had long been a target of rice extraction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while frequent tenancy disputes and peasant struggles provided fertile ground for the rise of leftist forces. These conditions directly shaped the dynamics of power realignment in the political vacuum after liberation.

The Namwon Incident epitomized the confrontation between the U.S. military government and the local People’s Committee. The military government attempted to dismantle the administrative and policing functions of the committee and to assume control over the management of enemy property(jeoksan). In response, residents staged protests, during which U.S. troops opened fire, resulting in casualties. The conflict was driven not only by ideological confrontation between left and right, but also by intertwined factors such as economic interests, the disposition of former Japanese assets, and popular demands for the purge of pro-Japanese collaborators.

In the aftermath, the U.S. military government defined the People’s Committees as potential threats, strengthening its rule through the police and right-wing forces. This process facilitated the re-emergence of former collaborators in administrative positions and deepened ideological polarization. The Namwon Incident thus represented a critical juncture in the restructuring of local power relations in Jeollabuk-do, while also exposing the particularities and inherent limitations of power realignment in post-liberation Korea. By examining this case, the study underscores the importance of analyzing local power dynamics and transformations, beyond the framework of central politics, in order to broaden our understanding of the liberation space.

Key Words : U.S. military governmentJeollabuk-doNamwon IncidentPeople’s CommitteeEnemy Property

각주

  1. 이 논문은 2025년 전북연구원 전북학연구센터의 전북학 연구지원사업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
  2.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연구교수, E-mail: songjh0171@gmail.com ↩︎
  3. 남원사건을 다룬 주요 연구로는 다음과 같다. 여운모, 「1945年 南原地方의 左·右翼 葛藤에 관한 硏究,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속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9;박재호, 「미군정기 전북지역 좌·우익의 활동」, 건국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7;송정현, 「해방 이후 전북지역 미군정 활동」, 『남도문화연구』 28, 2015. ↩︎
  4. HQ, USAFIK,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Ⅲ, Provincial and Local Government: Cholla-pukto, ChapterⅢ,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1949(국사편찬위원회 편, 『주한미군사』 3, 국사편찬위원회, 2014). ↩︎
  5. History of 56th Military Government Hq & Hq Co, 국사편찬위원회 편, 『韓國現代史資料集成 50: 美軍政期 軍政團 軍政中隊 文書』 4, 국사편찬위원회, 2001, p.75. ↩︎
  6. HQ, USAFIK,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Ⅲ, Provincial and Local Government: Cholla-pukto, ChapterⅢ,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1949(국사편찬위원회 편, 『주한미군사』 3, 국사편찬위원회, 2014). ↩︎
  7. Historical Report, 1946-00-00, 국사편찬위원회 편, 『韓國現代史資料集成 50: 美軍政期 軍政團 軍政中隊 文書』 4, 국사편찬위원회, 2001, p.400. ↩︎
  8. HQ, USAFIK,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Ⅲ, Provincial and Local Government: Cholla-pukto, ChapterⅢ,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1949(국사편찬위원회 편, 『주한미군사』 3, 국사편찬위원회, 2014). ↩︎
  9. 28TH MILITARY GOVERNMENT HEADQUARTERS AND HEADQUARTERS COMPANY APO 6, 국사편찬위원회 편, 『韓國現代史資料集成 47: 美軍政期 軍政團 軍政中隊 文書』 1, 국사편찬위원회, 2001, p.115. ↩︎
  10. 앞의 자료, 巖南堂書店, 1979, 413쪽. ↩︎
  11. 앞의 자료, 巖南堂書店, 1979, 416쪽. ↩︎
  12. Historical Report, 1946-00-00, 국사편찬위원회 편, 『韓國現代史資料集成 50: 美軍政期 軍政團 軍政中隊 文書』 4, 국사편찬위원회, 2001, p.401. ↩︎
  13. 전북도청 옛 청사 건물을 접수하여 사용한 전라북도 미군정청. 현재는 전라감영이 위치한다.(U.S. Military Government Headquarters (H.Q.), Cholla Pukto). 출처: 전주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이정욱 교수 제공. ↩︎
  14. 김영정 외, 『근대 항구도시 군산의 형성과 변화』, 한울, 2006, 93-95쪽. ↩︎
  15. HQ, USAFIK,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Ⅲ, Provincial and Local Government: Cholla-pukto, ChapterⅢ,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1949(국사편찬위원회 편, 『주한미군사』 3, 국사편찬위원회, 2014). ↩︎
  16. 앞의 자료, 巖南堂書店, 1979, 416-417쪽. ↩︎
  17. Cholla-Namdo, 앞의 자료. 해당 부서의 담당자는 다음과 같다. 도지사(道知事) 정연기(鄭然基, 창씨명: 草本)·주재서기관(駐在書記官) 고이즈미 히로시(小泉弘)·참여관(參與官) 兼 광공부장(鑛工部長) 히라이 윤(平井尹相, 조선인)·내무부장(內務部長) 와타나베 도시오(渡辺俊雄)·재무부장(재무부장) 오자키 다케오(尾崎丈夫)·농상부장(農商部長) 히가시 나가유키(東長行)·경찰부장(警察部長) 호시데 가즈오(星出壽雄). 앞의 자료, 巖南堂書店, 1979, 408쪽. ↩︎
  18. 정연기(鄭然基)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1918년 농공공부 기수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전라북도 참여관을 지냈으며, 1945년 전라북도지사에 임명되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전시총동원체제 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근로부장으로 활동하였고, 1939년 10월 결성된 사회교화기관인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전북유도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김원도, 「일제강점기 조선인 도지사 연구」, 경성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8, 18쪽, 97쪽 참조. ↩︎
  19. 앞의 자료, 巖南堂書店, 1979, 408-411쪽. ↩︎
  20. 배은희(裵恩希)는 해방 이후 전북지역의 대표적인 우익 인사로, 이승만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신간회를 조직하였으며, 해방 직후에는 임시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이승만을 ‘국부’라 칭한 인물로서,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의 신임을 받아 초대 고시위원장에 임명 되었다. 한편 그의 아들 배운석(裵雲石)은 한국전쟁 이후 유직양의 아들 유청(柳𤦭)의 후임으로 전주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송정현, 「해방 이후 전북지역 미군정 활동 연구」, 『남도문화연구』 28, 2015, 145쪽. ↩︎
  21. 박재호, 「미군정기 전북지역 좌·우익의 활동(1945.8-1948.8)」, 건국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8, 14-15쪽. ↩︎
  22. 앞의 자료, 巖南堂書店, 1979, 411쪽. ↩︎
  23. 송정현, 「해방 이후 전북지역 미군정 활동」, 『남도문화연구』 28, 2015, 135쪽. ↩︎
  24. 건국청년운동협의회, 『대한민국건국청년운동사』, 1989, 690쪽. ↩︎
  25. 박재호, 「미군정기 전북지역 좌·우익의 활동」, 건국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8, 16쪽. ↩︎
  26. 전라북도에서 신간회가 처음 조직된 것은 1927년 5월 10일 전주지회 결성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군산·김제·남원·부안·정읍·임실·순창 등지로 지회가 확대되었다. 주요 활동가로는 전주의 배은희(裵恩希)·백용희(白庸熙)·장재섭(張在燮), 군산의 조용관(趙容寬)·김응배(金應培)·김홍두(金洪斗), 김제의 강태호(姜泰浩), 남원의 박기영(朴琪永)·심주하(深柱厦), 부안의 신기익(辛基益), 정읍의 정헌교(鄭憲喬) 등이 있었다.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지역 정치 주도권을 행사하며 인민위원회와 자치 조직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균영, 『신간회 연구』, 역사비평사, 1993, 11쪽. ↩︎
  27. 박종암(朴鐘岩, 1909년 2월 5일생)은 남원군 운봉면 동천리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남원청년동맹 운봉지부를 결성하고 임철호(林喆鎬)·안희탁(安禧鐸)과 함께 농민조합과 농민계를 조직하여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야학회를 개설해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로 인해 1933년 4월 19일 전주지방법원, 같은 해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남원시, 『南原抗日運動史』, 1999, 431-432쪽. ↩︎
  28. 양판권(梁判權)은 1928년 6월 27일 전주농업학교 동맹휴학의 주동자였다. 이는 친일 교사가 일본인 학생을 편애하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교사 축출을 요구한 사건으로, 이로 인해 12명이 퇴학, 9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양판권은 다른 주동자 3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남원시, 『南原抗日運動史』, 1999, 434쪽. ↩︎
  29. 《서울신문》(1945.12.4.), 조사단의 귀환보고(상), 남원사건의 진상調査團의 歸還報告(上), 南原事件의 眞相. ↩︎
  30. 《全國勞動者新聞》(1945.12.1.), “천인공노할 민족반역자의 악행, 남원사건의 진상”. 당시 김응조가 인솔한 무장경찰의 수는 사료에 따라 다르다. 《中央新聞》(1945.12.5.)은 20여 명, 《全國勞動者新聞》(1945.12.1.)은 40여 명으로 기록하였다. 해산 요구에 맞서 주민 수 또한 《中央新聞》은 700~1,000명, 《全國勞動者新聞》은 2만 명, 《서울신문》(1945.12.4.)은 2,000명으로 달리 전한다. 남원사건 피해 규모 역시 상이하다. 《中央新聞》(1945.12.5.)은 사망자 3명한성배·박병갑·김철웅)과 부상자 7명으로 보도하였고, 《全國勞動者新聞》도 사망자 3명으로 전했다. 그러나 미군 측 보고(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Ⅲ, ChapterⅢ Provincial and Local Government: Cholla-pukto)는 사망자 2명과 경찰 부상 1명만을 기록하였다. 이는 사건 당일 상황만 반영하고 이후 부상자가 사망에 이른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
  31. HQ, USAFIK,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Ⅲ, Provincial and Local Government: Cholla-pukdo,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1949(국사편찬위원회 편, 『주한미군사』 3, 국사편찬위원회, 2014). ↩︎
  32. 《中央新聞》(1945.12.5.), “日人과 叛逆者가 謀略, 南原事件眞相報告內容”. ↩︎
  33. 《新朝鮮報》(1945.12.5.), “南原事件의 眞相(上)”.《新朝鮮報》(1945.12.8.), “南原事件의 眞相(中)”. ↩︎
  34. 《서울신문》(1945.12.4.), 조사단의 귀환보고(상), 남원사건의 진상調査團의 歸還報告(上), 南原事件의 眞相. ↩︎
  35. G-2 Periodic Report, HQ 6th Infantry Division, Chonju, Korea,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편,『지방미군정자료집』 2, (경인문화사 영인, 1993), p.432. ↩︎
  36. 여운모, 「1945年 南原地方의 左·右翼 葛藤에 관한 硏究」,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속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9, 33쪽. ↩︎
  37. G-2 Periodic Report, HQ 6th Infantry Division, Chonju, Korea, 앞의 자료, p.46. ↩︎
  38. G-2 Periodic Report, HQ 6th Infantry Division, Chonju, Korea, 위의 자료, p.159. ↩︎
  39. G-2 Periodic Report, HQ 6th Infantry Division, Chonju, Korea, 위의 자료, p.180. ↩︎
  40. G-2 Periodic Report, HQ 6th Infantry Division, Chonju, Korea, 위의 자료, p.320. ↩︎
  41. 박태균, 「1945-1946년 미군정의 정치세력 재편계획과 남한 정치구도의 변화」, 『한국사연구』 74, 1991, 115쪽. ↩︎
  42. Research Professor, Institute of Korean Classical Studies, Jeonju Universit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