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양. (2025). 보덕성(報德城) 반란을 바라보던 ‘시선’들 : 관련 기사에서 사용된 표현에 주목하여 . 전북학연구, 15, 81-113.
Series/Report no.
전북학연구; 제15집
Abstract
684년 11월 보덕성(報德城)에서 발발한 반란에 대한 정보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내에서 신라본기(新羅本紀) 신문왕(神文王) 4년(684) 11월조와 김영윤열전(金令胤列傳)·핍실열전(逼實列傳)이라는 세 가지 자료에 의해 전해져 왔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 記)』 직관지(職官志) 무관(武官) 9서당(九誓幢)조에 보이는, 686년 '보덕성 백성'으로 구성, 창설된 부대 적금서당(赤衿誓幢)·벽금서당(碧衿誓幢) 또한 보덕성에서의 반란이라는 사건에 대한 사후 수습책으로서 함께 살펴져 왔다.
그 가운데서 가장 먼저 신문왕본기 4년(684) 11월조의 세주(細註)에서 대문(大文)과 실복(悉伏)이라는 인물이 혼동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동시에, 이 기사에는 금마저(金馬渚)·금마군(金馬郡)이라는 두 종류의 지명이 함께 나타난다. 이를 근거로 이 기사는 본래 나뉘어 있던 두 자료가 하나로 합쳐져 현재의 형태로 성립하였다고 보았다. 그 가운데 한 자료는 대문이 주살당한 것을 본 '남은 사람들[餘人]'이 반란을 일으켜 이들이 제압당하는 과정에 주목한 것으로 비교적 당대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보았다. 반면 다른 한 자료는 반란의 경과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만 다루었고 이후 지방 사회의 재편에 주목하였으며 684년 10월의 유성우(流星雨) 기사를 언급하며 도참적 성격을 내비쳤던 자료였던 것으로 추측하였다.
다음으로, 보덕성에서의 반란을 전하는 또 다른 자료들인 김영윤열전·핍실열전에서 공통적으로 '고구려 잔적(殘賊)'이라는 표현이 사용됨에 주목하였다. 이는 강력한 적대감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으로,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가하였다가 전사한 두 인물의 주변 인물들이 그들의 공적을 내세우려 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9서당(九誓幢) 부대의 편성에 대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직관지(職官志) 무관(武官)조의 기사로, 이 기사에서 쓰인 '보덕성 백성'이라는 표현은 반란 이후 그들을 '백성'으로서 다시 포용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686년 '고구려 사람'에 대한 '경관(京官)' 수여와 비신라인계 서당의 깃 색[衿色] 사용, 3무당(三武幢) 가운데 두 부대인 적금무당(赤衿武幢)·황금무당(黃衿武幢)의 편성 순서 등을 고려할 때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결론적으로, 보덕성에서의 반란이라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 쓰인 다양한 표현을 되짚어 봄으로써 인간이 언어를 통해 어떻게 사건을 규정하여 나가는지에 대해 살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인간이 써 나가는 역사라는 개념을 살핌에 하나의 중요한 실마리를 줄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두 시간의 교차: 신문왕본기(神文王本紀) 4년(684) 11월조의 계통과 형성
3. '고구려 잔적(殘賊)'과 '보덕성 백성': 엇갈리는 두 시선
4. 맺음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