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울릉도 관리와 1614년 동래부사의 서계

Title
조선의 울릉도 관리와 1614년 동래부사의 서계
연구책임자
이훈
키워드
울릉도, 1도2명, 關防, 海禁, 도쿠가와 막부, 서계(書契), 대마번, 의죽도, 윤수겸(동래부사, 1614.7), 박경업(동래부사, 1614.9), 이여(예조참판, 1694.9)
Issue Date
2023-12-31
Publisher
전북연구원 전북학연구센터
Citation
이훈. (2023). 조선의 울릉도 관리와 1614년 동래부사의 서계. 전북학연구, 10, 175-220.
Series/Report no.
전북학연구; 제10집
Abstract
본 연구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울릉도 영유와 관리 문제를, 1614년 일본측(대마번)의 울릉도(竹島) 탐사 요청과 이에 대한 조선의 대응을 중심으로 검토해 본 것이다. 그 결과 1614년 동래부사의 회답 서계(윤수겸·박경업)에 반영된 조선 정부의 울릉도 영유에 대한 논리 및 변경 관리(關防) 방침이 17세기 말 ‘울릉도쟁계’ 교섭시 예조의 서계(예조참판 이여, 1694.9)에도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규명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3가지 논리가 관철되어 있었음을 밝혔다.
① 첫째는, 울릉도가 조선 영유라는 근거로서 「竹島(竹島)=鬱陵島」라는 「1도 2명」논리가 이미 1614년 당시부터 구사되었다는 것이다.
② 둘째, 대마번주 앞으로 발급된 동래부사의 서계(2통)에는, 우선 ‘일본인(또는 일본 선박)의 울릉도 무단 도해 금지 및 ‘약조’(기유약조, 1609)에서 정한 항로(「대마도↔부산포」직항로) 이탈 시에는 일본의 민간인이라 하더라도 ‘처벌’하겠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이는 15세기 중반 이래 조선의 해금(海禁)을 바탕으로 한 변경 관리 방침이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
③ 셋째는, ‘일본인(또는 일본 선박)의 울릉도 무단 도해 금지를 막부에 전달해 달라’는 요청이 기재된 동래부사(1614, 윤수겸·박경업)의 회답 서계를 대마번이 수 령한 이후 이를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대마번은 ‘울릉도쟁계’ 교섭(1693~1699년)이 진행 중이던 1695년 시점까지 80년 가까이 보관·검토했음에 도 불구하고, 결국은 ‘鬱陵島(蔚陵島)=竹島’의 증빙 자료로서 동래부사(1614, 윤수겸·박경업)의 회답 서계를 막부에 제출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그 이유로는 대마번의 존속과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울릉도(竹島) 탐사 요청에 대한 ‘이에야스 지시’의 참칭을 은닉하기 위해 고의로 누락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론해 보았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조선의 강역 관리와 울릉도
3. 1614년 일본측(대마번)의 울릉도 탐사 요청
4. 1614년 동래부사의 회답 서계와 조선의 대응
5. 17세기 말 ‘울릉도쟁계’ 교섭과 예조 서계로 본 1614년의 대응 논리
6. 대마번의 대막부 대응과 1614년 동래부사 서계의 행방
7. 맺음말
참고문헌
URI
http://repository.jthink.kr/handle/2016.oak/1314
ISSN
2713-5772
Appears in Collections:
전북학연구센터 > 전북학연구
Files in This Item:
JSJ1007_조선의 울릉도 관리와 1614년 동래부사의 서계.pdfDownload
Export
RIS (EndNote)
XLS (Excel)
XML

qrcode

Items in D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