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연구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 말-고려시대 초에 걸쳐 시대별 문화상의 변화에 대한 논의가 비교적 많이 이루어진 익산 지역이나 후백제의 왕도가 위치한 전주 지역에서 통일신라시대 말~고려시대 초에 출토된 유물에서 후백제의 문화상을 추출하고 그 특징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더 나아가 후백제 왕도의 구조와 성격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전주와 익산 지역에서 출토된 후백제의 와당의 종류나 수량은 조사 상황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변화의 흐름이나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9세기 전반부터 과거 백제 양식을 모방한 와당이 조금씩 나타나고, 9세기 후반~10세기 전반에 걸쳐 기존 흐름이 한층 강화되거나 백제 양식을 단순 모방 수준에서 벗어나 후백제 나름의 독특한 문화상이 등장한다. 이런 양상은 ‘후백제 전기 양식’과 ‘후백제 후기 양식’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와당과 달리 전주와 익산 지역에서 출토된 후백제 관련 명문와는 사찰명이나 지역명에서 모두 와당과 달리 양 지역에서 차이가 드러났다. 전주 지역에서는 과거 백제 당시의 지명인 ‘完山(완산)’이란 지명 명칭 대신에 경덕왕(景德王) 16년(757 년) 이후부터 사용되어 왔던 ‘全州(전주)’란 지명의 명문와가 그대로 확인되었다. 이와 달리 익산 지역에서는 사찰이나 산성을 불문하고 모두 과거 백제 당시의 지명인 ‘金馬渚(금마저)’란 명칭의 명문와가 ‘城(성)’이나 ‘官(관)’이란 단어와 함께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익산 대관사지의 3차 가람에서 사찰 명칭이 백제 당시의 ‘大官寺(대관사)’에 ‘官(관)’이란 단어가 추가되기도 하였다. 결국 전주는 ‘신라’ 체제를, 익산은 ‘백제’ 체제가 결합된 이중 구조가 내재되어 있다. 이런 구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익산 대관사지의 ‘왕궁탑’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결국 견훤이 지향한 후백제는 ‘신라’의 기초 위에 ‘백제’를 표방하는 국가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후백제의 왕도는 정치적인 중심 도시인 전주, 종교신앙의 중심 도시인 익산으로 구성되어 있는 구조로 시론적으로 설정해 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후백제 당시에 왕도가 위치한 ‘完山’이란 지명은 ‘全州’라는 단순히 행정구역을 넘어 ‘金馬渚(익산)’까지 포함하는 큰 함의를 내포하는 명칭으로 받아들어졌을 가능성도 제기해 본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연구 대상과 연구 방법
3. 자료 검토와 분석
4. 특징과 성격
5. 후백제 왕도의 구조와 성격
6. 맺음말-향후과제를 중심으로-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