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숙. (2022). 6세기 전후 전북 동부지역 가야세력과 신라의 관계에 대하여 . 전북학연구, 6, 75-102.
Series/Report no.
전북학연구; 제6집
Abstract
문헌상으로는 금관가야가 532년(법흥왕 19)에, 대가야가 562년(진흥왕 23)에 각각 멸망하였다. 그런데 「일본서기」 흠명기 기사 속에는 562년경 신라가 가라국과 안라국을 비롯한 가야 10개국을 모두 멸망시킨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신라에 의한 가야 병합이 대가야의 멸망을 전후하여 최종 투항 상태를 전하는 것 일뿐 일시에 이루어지진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들 가야 10개국 가운데 졸마국과 마찬가지로 임예국 역시 아직까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기존에는 졸마국을 함양에, 임예국을 의령에 각각 비정해 왔다. 그런데 임예국은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에 의해 토벌된 가야 소국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언급된 나라이면서 걸손국 산청과 비교적 가깝고 장수 등 전북 동부지역과도 근거리에 위치한다. 따라서 비록 명확한 증거자료는 없을지라도 임예국의 위치를 다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본고에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함양(咸陽)을 지목하였다. 함양은 동쪽으로 거창과 산청, 서쪽으로 전북 남원과 장수, 남쪽으로 하동, 북쪽으로 거장군과 접해 있다. 그러므로 졸마국은 함양이 아닌 김천에, 임예국은 의령이 아닌 함양에 각각 비정하는 것이 좀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신라는 5세기 후반 이후부터 이미 대가야 및 금관가야 등 가야 여러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도 강화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고구려 및 백제의 동향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즉, 백제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고구려의 남하에 정치·군사력을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백제의 성왕은 즉위하자마자 신라에 사신을 보내거나 고구려의 침공으로 어려움을 겪자 신라에게 청병을 요청하는 등 신라와는 되도록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또한 그는 가야지역으로 백제의 군대를 파견하여 성을 쌓게 하는 일까지 추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는 가야지역에 대한 신라의 진출에 대해서 외교책을 통해 관리하려 했을 것이다. 반면 신라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에 걸쳐 전북 동부지역 가야세력과의 접촉이나 교역을 통해 백제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는 가야를 둘러싼 당시 주변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가야 남부지역에 진출하는 대외정책을 펼쳤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라에 의한 전북 동부지역으로의 진출 루트는 운봉고원에서 진안고원으로 넘어가는 방향이었고 전북 동부지역의 남원 월산리나 두락리 일대는 내륙교통로로서 신라가 가야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핵심요충지이며 철의 생산지가 분포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신라 관련 유물이 발견된 것뿐만 아니라 전북 무주에서도 6세기 중엽 이후로 편년되는 신라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6세기 전후 전북 동부지역의 정세
3. 6세기대 전북 동부지역의 가야세력과 신라의 진출
4. 맺음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