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는 식민지배정책을 조선 촌락까지 효율적으로 전파시키기 위해 각종 지역공동체와 사회단체를 활용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 향교는 자연스럽게 식민권력의 통제권 안으로 포섭되었고, 식민권력은 향교를 통해 촌락 말단까지 식 민 이데올로기와 일본제국주의의 효용 가치를 홍보하였다. 본고에서는 이 점에 착 안하여 일제강점기 향교가 식민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활동한 실제 사례를 익산문 묘 예산 보고서를 통해 살펴보았다.
익산문묘 세입·세출 분석 결과 전통시대 지역민의 윤리적 소양과 교화, 성현에 대한 예를 집례하던 향교는 일제강점기 이후 그 운영 형태에 변화가 발생하였다. 향교 운영권 및 재산처분권이 지역 유림이 아닌 조선총독부 권한으로 이관되었고, 이로 인해 향교 활동 역시 관변적인 성향을 보였다. 전시체제기에 가까울수록 향교 의 식민지 동원 활동은 더욱 노골화 되었다.
익산문묘의 관변적 활동 양상이 가장 잘 나타나는 지출 항목은 ‘교화비’와 ‘기부 및 보조금’이다. ‘교화비’는 지방개량비, 강연 및 강습회비, 선행자 표창비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모두 1930년대 중반부터 이루어진 식민지배정책과 관련되어 전 시체제기 지역사회 동원에 그 목적이 있었다. ‘기부 및 보조금’ 지출의 특징은 ‘식 민지배 관련 단체 지원’과 ‘시찰(視察) 지원’이었는데 이 역시 시국 인식 및 전시체 제 동원을 위한 활동의 일환이었다.
전근대 향교는 지역민 교화와 향촌 교육을 중점으로 활동하였지만 근대에는 식 민지배체제에 예속되어 식민선전기관으로 전락하였다. 1930~40년대 익산문묘의 지역사회 활동 역시 외피만 ‘향교’라는 전통의 형태를 띠고 있을 뿐, 운영의 본질 은 근대 식민권력기구 형태와 동일하였다. 익산문묘는 전근대와 동일하게 ‘교화’를 표방하였지만 이 때의 교화는 근대 식민주의가 유입된 이전과 다른 형태의 교화였 고, 사회교화의 중요성은 일제 패망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강조되었다.